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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한우물 가게 – 성광표구사
작품의 마지막을 완성한다는 것은

※ 김해시는 개업한 지 30년 이상 된 가게 26곳을 발굴해 ‘한우물 가게’로 선정했다. 본지에서는 오랜 시간과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한우물 가게를 매달 한 곳씩 다루고 있다

하얀 화선지 위로 먹이 그려낸 고운 선이 농담을 달리하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작가는 한 폭의 산수화를 위해 먹보다 검은 속을 끓이며 화선지보다 더 희게 밤새웠으리라. 작가의 고뇌가 담긴 소중한 작품은 보관을 잘해야 한다. 특히 동양화는 더욱 그렇다. 동양화 작품을 일반 액자에 넣어 전시하면 몇 년 뒤 작품이 모두 삭아 없어진다. 한지가 숨을 쉬지 못해 썩는 것이다. 동양화 작품은 어떻게 액자화되는 것일까? 성광표구사의 장맹률 대표가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표구이지요. 동양화는 표구가 필요합니다.” 33년째 표구 작업을 해 오는 그에게서 표구와 삶에 대해 들어보았다.

주소 김해시 가락로 112(서상동)
문의 055-321-2722

새로운 방향으로
1987년 김해전화국에서 근무하던 장 대표는 돌연 표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그와 표구의 인연은 우연히 시작됐다. “전화국에서 근무하던 때에 친한 동료가 표구사를 겸직으로 운영하고 있었어요. 당시 전화국 근로 스케줄은 24시간을 근무하고 다음 날 24시간은 쉬는 방식이었지요. 쉬는 날 자고 일어나면 낮에는 시간이 남으니 동료의 표구사에 놀러 갔어요.” 장 대표는 놀러 간 표구사에서 동료를 도와 주면서 표구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들어 주는 식이었어요. 가위를 가져다주고 물을 떠주고 하는 식으로 하다가 저도 모르게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이 일을 평생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삶의 방향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동료의 표구사에서 일을 배워가던 장 대표에게 표구업은 성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전화국을 그만 두고 농사를 짓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러 상황이 저를 표구업으로 이끌었습니다. 동료의 표구사에서 정식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지요. 아이러니하게도 표구를 알려주던 동료가 농사를 짓는다고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정든 동료의 표구사를 인수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3년이 흘렀네요.”

노력을 배접하다
장 대표는 멋쩍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실수도 많이 했지요. 표구의 가장 기본이 작품을 빳빳하게 펴는 것입니다. 화선지에 그림과 글을 쓰게 되면 먹이 마르면서 종이가 쭈글쭈글해지거든요. 그림이 그려진 뒷면에 물을 뿌리고 솔질을 하면서 말리면 다림질한 것처럼 작품이 쭉 펴집니다. 초보 표구사는 여기서 실수를 많이 하게 되지요.” 누구나 처음은 어렵다. 지금은 베테랑인 장 대표지만, 초보인 시절에 웃지 못할 실수를 많이 했다고 한다. “작품을 맡겨주신 작가에게 혼나기도 하고 어린 손님을 울린 적도 있어요. 먹과 물감의 종류에 따라 표구가 어려운 경우가 가끔 있어요. 특히 어린이 작가의 작품은 옷이나 손에 묻으면 잘 지워지는 수용성 안료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에 표구를 위해 물을 뿌리면 그림이 번지거나 지워집니다.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학생들의 작품을 가져와 표구를 부탁하신 적이 있었어요. 표구하고 보니 한 아이의 그림만 물감이 번져서 그림이 상하고 말았지요. 선생님께서는 이해하셨지만, 각자의 작품을 찾으러 온 아이들 사이에서 왕 하고 울음을 터트린 그림 주인이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제 그림만 이상해졌어요.’ 그 일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어요. 정말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작품을 작품답게 만든다는 것은
실수를 실력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계속해서 노력했다. 회상에 잠긴 장 대표의 표정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표구는 참 손과 시간이 많이 가는 작업입니다. 작품에 종이를 덧바르는 배접부터 창살로 된 화판에 그림을 붙이고 비단으로 주변을 꾸미지요. 이 모든 과정에서 실수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실수는 곧 작품을 망치게 되기 때문이지요. 어렵고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어요. 하지만 그림을 받아 반듯한 액자에 넣으면 작품이 작품다워지지요. 보기에도 예뻐 보이잖아요. 참 뿌듯합니다.” 벽에 걸린 작품을 가리키며 웃어 보인 장 대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동양화는 표구해야 작품을 오래 보존할 수 있어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작업인데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서 일감이 줄다 보니 젊은 기술자들이 거의 없어요. 기술이 사장될까봐 걱정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표구사를 찾는 인구가 더욱 줄어들고 있다고 말하는 장 대표. 김해시에 많던 표구사들은 다 사라지고 이제는 3곳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저는 힘닿는 날까지 계속해서 표구 작업을 할 것입니다. 표구가 필요하다면 방문해주세요.”

오늘도 붓에 발린 풀을 종이 위에 곱게 바르는 장 대표가 성광표구사를 지킨다. 한 폭의 화선지 그림을 액자 속의 작품으로 만드는 일 또한 예술이다. 작품을 작품으로 만드는 장 대표의 표구사에는 조용한 붓 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작성일. 2020. 0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