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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 빌> 정영두, 김동규, 김설진 안무가
익숙한 일상에서 낯선 나와 만나기

파워풀한 군무, 시원시원한 움직임, 빠른 속도감, 폭발적인 에너지! 현대무용단으로는 이례적으로 많은 팬을 보유한 스타 무용단 LDP(Laboratory Dance Project)는 신창호, 차진엽, 김영진, 김동규, 김판선, 김성훈, 김재덕, 김보라 등 많은 스타 무용수와 안무가를 배출하며 신진 무용단을 넘어 현대무용계의 중심과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2015년 진행했던 공연 <Graying>(신창호 안무)과 <12MHz>(김판선 안무)에 이어 두 번째로 LG아트센터와 손을 잡고 신작 <트리플 빌>을 선보인다. 늘 국내·외 안무가와 협업했던 LDP가 이번에는 현대무용가 정영두, 김설진을 초빙해 김동규 대표와 한 무대에서 세 편의 ‘동시 상연’을 펼친다. 춤과 몸의 긴밀한 관계를 집요하게 파헤치며 존재감을 과시해온 세 안무가는 LDP와 만나 어떤 시너지를 보여줄지 공연의 귀추가 주목된다.

다양한 상념이 교차하는 시간 <새벽>

LDP가 <트리플 빌>을 위해 고려한 안무가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첫째, 자신만의 색깔이 분명한 사람. 둘째, LDP와 조화를 이뤄 단체의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사람. 두 기 준으로 낙점된 이가 정영두다. LG아트센터에서 <제7의 인간>, <먼저 생각하는 자 – 프로메테우스의 불>, <푸가>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호평을 받은 정영두는 정적(靜的)이면서도 섬세한 통찰과 구성으로 존재감을 다져왔다. 역동적이고 경쾌한 움직임으로 대표되는 LDP와 다른 결처럼 느껴지지만, 오히려 그런 색깔의 차이가 정영두에게 기대를 걸 만한 이유다. 그가 책임지는 <트리플 빌>의 한 챕터는 <새벽>이다. 어떤 상황을 은유하는 단어가 아니라 자정과 아침 사이의 ‘새벽’을 말한다. “새벽에 깨어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낮이나 밤과는 다른, 여러 가지 기분이나 감정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이 신비스러운 순간에 느껴지는 감정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이번 공연에 잘 어울릴 것 같더군요.” ‘새벽’이라는 주제는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다. 광범위하지만 동시에 제한적이다. 이런 모순적인 영역에서 그가 표현하려는 새벽의 모습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그는 “특별한 메시지나 스토리를 만들 생각은 없다”라고 단언한다. 단지 새벽의 분위기나 이미지들을 춤과 공간으로 형상화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설명이다. “새벽은 침착하고 고요하지만, 동시에 기대와 흥분, 후회 등의 감정이 밀려오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작품도 그런 새벽의 특성을 담아 침착하고 차분하게 전개하다가, 다양한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들을 표현하려 합니다.” 그는 일상 속의 관습화된 동작을 활용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새벽’이라는 소재와 그가 만들어갈 ‘상념의 동작들’은 신체의 섬세한 움직임을 정제해 자신만의 춤 언어로 만들어내는 그간의 접근법을 떠오르게 한다. <새벽>은 정영두의 그 독창적인 시각과 방법론을 LDP의 몸을 통해 볼 수 있다는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LDP를 이끄는 김동규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기인 정영두는 무용단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성장 과정을 지켜봤다. 하지만 밖에서 본 것과 실제로 함께한 LDP는 달랐다. “그동안 주로 파워풀한 작품을 많이 봐서 단원들이 그쪽에 강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부드럽고 섬세한 부분도 많더군요. 개개인의 색깔도 다양해서 앞으로 폭넓은 작품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영두와 LDP는 각자의 방식으로 현대무용과 관객 사이를 매개해온 이들이다. 그런 두 이름의 조합만으로도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감은 크다. 다만 정영두는 관객들이 이번 공연을 이해 하려고 애쓰기보다 편안하게 느끼기를 권유한다. “정말 새벽의 시간을 경험한다는 기분으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마치 자연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작품에서 느껴지는 것을 의심하지 말고 고스란히 받아들이면 훨씬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를 향한 욕망의 에너지 <MOMBURIM>

LDP는 2001년 창단 이후 실험적인 도전을 꾸준히 이어왔다. 특히 정기공연은 무용을 처음 보는 사람도 흥미를 느낄 수 있게 언어도 사용하고 상징적인 오브제도 활용하며 관객들에게 보는 재미를 선사했다. 2015년부터 대표를 맡은 김동규는 LDP를 이끌고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의 폐막식을 멋진 무대로 장식하며 전 세계에 한국 현대무용의 존재감을 알린 바 있다. 그야말로 종횡무진, 동분서주한 활동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매몰된 전문가들이 으레 한 번씩 부침(浮沈)을 겪듯, 김동규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수많은 공연으로 계속 몸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매너리즘에 빠지게 됐다. 동시에 이는 움직임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매번 움직임 하나하나에 큰 의미를 두면서 춤을 추다 보니 어느 순간 쉽게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게 아닌가 싶더군요.” ‘몸부림’이라는 화두는 이때부터 김동규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춤을 어떻게 춰야 하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몸부림을 친 거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면의 꿈틀거림’이 시작됐다. ‘몸부림’이라는 말은 구속된 신체의답답함을 연상시킨다.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꿈틀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제약과 자유 욕망의 관계는 이번 작품의 안무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단원들과 연습할 때 움직임을 금지함으로써 오히려 움직이고 싶은 본능을 자극한 것이다. “5분이든, 10분이든 무용수들을 가만히 세워놓고 손가락 하나 눈썹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했어요. 그랬더니 손가락을 까딱까딱하고 눈을 감았다가 뜨는 등의 미세한 움직임이 나오더라고요.”
연습 과정에서 무용수들의 반응은 그대로 작품의 재료로 쓰였다. ‘멈춤’이 힘들어 꿈틀거리는 무용수들의 모습은 작품 사이사이에 삽입됐다. 흔히 ‘몸부림’이라고 하면 온몸을 비틀어 에너지를 발산하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김동규의 해석은 다르다. “엄청난 에너지를 표현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꿈틀거림이 내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죠. 그런 상상이 구체화된 것이 제가 생각한 ‘몸부림’입니다.” 그래서 그는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간신히 움직였을 때, 중간을 건너뛰고 극한의 자유로움을 느끼는 극단적 상황들에만 집중해서 그만의 몸부림을 완성해냈다. 움직임에 의미를 두는 게 아니라 움직이고 싶은 욕구 자체에 주목한 것이다.
이번 <트리플 빌>은 김동규로서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도전이기도 하다. 총 23명의 단원 중12명의 정단원은 정영두, 김설진 두 안무가와 함께하고 입단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11명의 준단원들과 작업하기 때문이다. 본인과의 작업에 익숙한 멤버 대신, 서로에게 충분히 적응되지 않은 조합이 관객 앞에 나서는 셈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오히려 ‘안무가 김동규’만의 색깔이 드러날 수 있기에 <MOMBURIM>이 더 기대된다.

왜곡된 기억의 뿌리를 찾아서 <MARRAM>

벨기에의 피핑톰 무용단에서 활약하던 김설진은 내한공연 <반덴브란덴가 32번지>를 통해 국내에 이름을 알린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이후 Mnet <댄싱9>을 통해 기존 춤 무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출중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대중을 매료시켰다. 이런 대중친화적인 매력 덕분에 요즘 그는 무대보다 TV나 스크린에서 더 자주 보일 정도로 전방위로 활동 중이다. 무용을 알리기 위해 무대만 고집하기보다 다양한 장을 개척하는 행보는 확실히 여타의 무용가들과는 차별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김설진의 ‘독보적인 개성’은 <트리플 빌>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영두, 김동규와 달리 ‘콘셉트/디렉터’로 표기된 역할이다. 실질적으로 동작을 만들어주는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무용수들에게 콘셉트를 던지면 그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것들을 풀어내서 동작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무용수들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안무가’ 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거죠.” 김설진에게 무용수들의 응답이 중요했던 것은 이 작품이 그들이 지닌 ‘기억’에 근거하고 있기때문이다. 제목인 ‘MARRAM’ 역시 기억에서 비롯된 조어다. 기억 저장소를 뜻하는 RAM을 한번 더 뒤집어 앞에 붙인 이 말은 왜곡된 기억과 원래의 기억이 뒤섞인 상태를 가리킨다. 김설진에게 가장 중요한 창작 포인트도 ‘우리들의 기억은 과연 정확한 것일까’였다. ‘혹시 각자 기억하고 싶은 대로 저장된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에서 작품은 이미 시작됐다. 김설진이 이처럼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 삶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시간’과 ‘기억’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과거의 시간은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기억들은 사실 상당한 오류가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이 우리를 지배하는 이유가 뭘까,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실제와 왜곡된 기억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은 김설진의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는 놀이터다. 그로테스크하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관객들을 사로잡아온 그의 스타일을 돌이켜 보면, 이처럼 기억의 불완전함에서 파생되는 상황들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이런 콘셉트에서 중요한 것은 무용수들 각자의 해석이다. “제가 던진 질문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 궁금했어요. 그래서 계속 질문을 하면서 표현을 종용하고, 그런 표현들이 쌓이면서 하나의 작품이 됐죠.” 김설진의 작품은 어딘지 몽환적이면서도 시선을 끄는 데가 있다. 테크닉과 상상력의 절묘한 조화가 그런 매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MARRAM> 역시 LDP 특유의 고난도 테크닉과 김설진의 상상력이 만나, 보는 즐거움을 보장한다. 아울러 작품이 보여주는 다양한 기억의 몸짓에서 자신의 기억과의 접점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송준호
송준호 공연 저널리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무용미학과 비평을 전공하고 주간 한국과 한국일보, 더뮤지컬을 거쳤다. 공연예술의 다양한 변화를 주시하며 대학에서 춤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작성일. 2019. 0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