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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이유
아직 끝나지 않은 <백조의 호수> 이야기

<백조의 호수>는 발레 역사를 통틀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발레를 잘모르는 사람도 ‘백조의 호수’라는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다. 그리고 ‘발레리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 또한 이 작품의 주인공 오데트 공주가 백조로 변신한 모습이다.

이렇듯 <백조의 호수>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만큼 오랜 세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고, 이 작품이 다른 작품보다 뛰어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점은 차이콥스키의 음악이다. 이전의 발레음악이 그저 무용수들의 동작을 맞춰주고 받쳐주는 반주와 장식이었다면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아름답고 유연하며 생동감 넘치고 변화무쌍하여 그 자체로 빼어난 관현악곡일뿐더러 그로부터 무한한 상상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드넓은 바탕이자 단단한 뼈대가 됐다.

바로 이 무한한 가능성으로부터 작품의 끊임없는 도전과 모험이 시작됐다. 그렇게 이어지는 길고 긴 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작품은 19세기 고전발레를 통틀어 가장 다양한 버전과 결말의 작품이 됐고 변신은 아직 끝나지 않은 네버엔딩 스토리다.

대본은 작곡을 의뢰한 베기체프와 볼쇼이극장의 총감독 겔체르가 공동집필했지만 그 이야기의 소재는 차이콥스키가 먼저 제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그가 조카들을 위해 독일 작가 무제우스의 동화에 나오는 백조 이야기를 작은 인형극으로 만든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러시아의 민화를 포함한 여러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본이 완성됐다.

호수로 사냥을 나간 지그프리트 왕자는 백조에서 사람으로 변한 오데트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로트바르트의 주문에 걸려 낮에는 백조로 살아야 하는 오데트는 한 남자로부터 변치 않는 사랑을 받아야만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말을 들은 왕자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지만 이를 지켜본 로트바르트는 다음 날 무도회에서 자신의 딸 오딜을 오데트인 것처럼 왕자에게 접근시키고 이에 속은 왕자는 오딜에게 청혼한다. 창밖에서 지켜보는 오데트를 발견하고서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왕자는 오데트를 쫓아 호숫가에 다다르지만 로트바르트가 다시 이들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이야기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1877년 초연 당시엔 지그프리트와 싸워 한 쪽 날개를 뜯긴 로트바르트가 힘을 잃어버리자 백조들도 마법에서 벗어나면서 지그프리트와 오데트가 다시 결합하는 이야기로 끝이 난다.

차이콥스키가 죽고 1893년, 작품을 발견한 프티파가 마린스키 극장으로 가져가 무대에 올린 <백조의 호수>는 결말이 다르다. 왕자의 배신에 절망한 오데트는 호수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지만 왕자가 그 뒤를 따르자 마법이 풀리며 두 사람은 함께 하늘로 오른다. 차이콥스키의 막냇동생 모데스트가 대본을 고치고 작곡가 드리고가 차이콥스키의 다른 음악들을 가져와서 덧붙였으며 프티파가 1, 3막을, 이바노프가 2, 4막을 안무했지만 사실상 변화의 대부분은 이바노프의 손을 거쳤다. 특히 2, 4막에 등장하는 백조 의상과 동작들이 새로운 것이었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모습이다.

이후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자 보다 희망차고 확실한 메시지를 원하는 당국의 지침에 따라 러시아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서는 실패한 초연 당시와 비슷한 결말로 돌아갔고 한동안 프티파와 이바노프의 안무를 그대로 따르던 서방 세계는 오히려 비극적인 결말을 시도한다. 주인공 둘이 모두 로트바르트에게 목숨을 잃는 로열발레단의 안무는 누레예프와 폰테인이 함께한 세기의 무대에서 지그프리트만 죽고 오데트는 백조로 남아 호수로 돌아가는 버전으로 바뀌었고, 1986년 파리오페라발레의 안무를 맡은 누레예프는 왕자가 죽고 오데트는 로트바르트와 함께 날아오르는 안무를 선보였다.

100년도 더 지난 현재, <백조의 호수>의 결말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2001년 볼쇼이발레에서는 오데트가 죽고 왕자만 홀로 남는다. 2006년 뉴욕시티발레에서는 주인공 모두 살아남지만 저주를 풀지 못한 오데트는 왕자와 영영 헤어져야 했다. 2009년 샌프란시스코발레에서는 프티파와 이바노프의 결말을 따르지만 두 주인공이 죽은 다음 두 마리 백조가 날아가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2010년 캐나다국립발레에서는 왕자가 오데트를 만나 용서를 받지만 로트바르트와 싸우다 목숨을 잃고, 2012년 러시아국립시베리아발레의 영국 공연에서는 왕자가 로트바르트를 끌어안고 호수에 몸을 던지면서 사랑도 잃고 저주도 풀지 못한 오데트는 홀로 백조로 남게 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백조의 호수>는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있기 때문에 아직 살아 숨 쉬는 것이다. 그래서 명작이고, 고전이며, 최고의 걸작이다.

홍승찬
홍승찬 음악평론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서양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오!클래식>, <생각의 정거장>, <인문학 명강 서양고전(공저)>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논문, 연구, 비평 등의 저술 활동, 공연 기획과 해설, 문화예술 강좌와 방송 해설,컨설팅 등의 활동을 해오고 있다.

작성일. 2019. 03.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