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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 속 숨은 유희를 찾는 예술 취향 - 작가 이승희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기획 전시 이승희: 2020 TAO

중국 북송시대 소동파는 시인이면서 그림에도 능한 철학자며 정치가였다. 어느 날 한 지인이 그를 찾아와 대나무 그림을 부탁했다. 마침 주변에 먹(墨)이 없고 붉은색 안료뿐이어서 그것으로 대나무를 그려주었다. 그 붉은 대나무 그림을 본 지인이 크게 실망하며 묻기를 “세상에 붉은 대나무가 어디 있소?”라고 했고, 그에 소동파가 답하기를 “그럼 세상에 검은 대나무는 있소?”라고 되물었다. 2020년 3월 27일(금)부터 6월 14일(일)까지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에서 열리는 기획 전시<이승희: 2020 TAO>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 <기억(Memory)>에 담긴 일화다.

이승희 작가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진 전통적 관습을 전복시키는 현대적 개념을 찾아 그것을 기초로 한 새로운 도자 작업을 시도하는 예술가다. 그는 흙이라는 재료가 지닌 한계를 넘어 도자와 평면(회화), 설치까지 끊임없이 실험한다. 그의 도전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예술 감상의 숨은 유희를 찾아 자극하는 단초가 된다. 큰 전시를 앞두고 준비가 한창인 이승희 작가를 만나 그의 작업 세계와 도자예술 작업을 대하는 자신만의 생각과 방식, 앞으로의 계획을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들어보았다.

지난 2017년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의 <경덕진; 백자에 탐닉하다> 기획전 이후 3년 만에 같은 공간에서 열린 전시입니다. 감회와 계획하고 있는 전시의 구상을 듣고 싶습니다

미술관 학예팀과 논의하여 약 7개의 섹션으로 나누어 시간의 흐름과 스타일을 고려해 구성할 예정입니다. 스스로 이번 전시 작업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작가 이승희’다워질 것인지와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를 연구하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이 전시는 제 작품 세계의 의미 있는 변곡점이 될 것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어떤 작품들이 새롭게 선보이게 될지 궁금합니다. 전시 작품 중 관람객이 가장 주목하길 바라는 특별한 작품이 있다면?

원형 돔 전시장에서 평면 도판 작업을 꼭 선보이고 싶습니다. 이 작업은 말로 설명하긴 힘들어 직접 보여드려야 합니다. 아마도 관람객과 설치된 작품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이전에는 느끼기 힘들었던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관람객들에게 선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 감흥을 관람객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에서는 우리 도자 역사 중 특정 시기에 출현한 전통 도자와 닮은 형태의 이미지가 보입니다. 특히 부조 형식의 백자 도판에 조선시대 도자기가 그려져 도예와 회화의 이중 언어를 지닌 <타오(TAO)> 연작은 언제 시작됐고, 천착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사실 조선백자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어요. 우연히 작업 환경을 바꾸게 될 기회가 생겨 이 새로운 환경에서 ‘어떤 작업을 할까?’ 생각하다가 시작된 것이 조선백자였어요. 저 자신이 흔히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조선백자를 떠올리고 박물관을 찾아가 그 작품을 마주한 순간, ‘아! 지금까지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을 막연히 알고 있었구나. 내 생각이 참 진부하네’라고 느꼈어요. 그 이후 2007년경부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조선 백자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됐고 찾아보는 시간이 늘어나고, 연구하고, 실험하면서 지금의 <타오(TAO)> 작업으로 완성됐습니다.

<타오(TAO)> 작품은 마치 기존의 관념적 도자기 구조에 대한 해탈을 경험하도록 이끄는 것 같습니다. <타오(TAO)>를 구상하게 된 의도는 무엇이고, 의도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어떤 고민과 표현 기법이 동원되었습니까?

2006년 처음 중국에 가기 전까지는 동양적 미학에 대해 전혀 공부한 적도, 관심도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 서양 미학에 주눅 들어 스스로 모자란 부분을 감추려고만했어요. 중국에서 작업 활동하는 동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동북아시아 미술에 관심도 생겼고, ‘나도, 내 아버지도 이곳(아시아)에 살아왔었지….’라는 생각을 새삼 떠올리며 ‘내가 내 아버지였다면 어떤 미감을 가지고 살았을까?’하는 막연한 의문도 갖게 됐고, 그것이 동양적 미학이나 미술, 역사 등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인식의 시작이 됐습니다. 그 무렵 우연히 중국 경덕진에 놀러 갔다가 이곳에서 1년만 작업을 해보면 그동안 느꼈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겼고, 다행히 가족의 허락을 구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벌써 13년이 흘렀네요. 작업에 관한 생각과 기법적인 고민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로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오랜 기간 한국(청주)과 중국(경덕진)을 오가며 작품 작업 활동 중이십니다. 세계 도자사적으로도 재료와 기술에 대한 의미가 깊은 경덕진에서의 작업 활동이 작가님의 작품 제작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합니다

도자기의 도시로서 경덕진은 무한한 매력을 가졌습니다. 마치 보석을 알아보는 이들이 돌멩이 사이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곳 같습니다. 제가 경덕진에서 작업하는 것도 그 일부를 시각(視覺)과 경험으로 체득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경덕진의 도자 제작 시스템은 아주 정교하게 분업화되어 있습니다. 그 프로세스 사이에서 섬세함을 발견합니다. 그 과정들은 제 활동에 대한 새로운 꿈이 되는 자양분입니다.

최근 중국에서 시작된 바이러스 확산 문제로 전시 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다. 현재 어떤 상황이며, 경덕진 현지에서의 작품 제작 계획은 어떤지 듣고 싶습니다

이번 전시를 위한 작업은 지난해 마무리했습니다. 경덕진에서 포장과 운송을 준비하다가 제가 잠깐 한국에 들어온 사이에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해 중국으로 들어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현지에 있는 친구들이 운송 작업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후의 일은 아직 불확실합니다. 저는 매 순간을 살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인가 부족할 때 궁리를 하고, 그 고민이 이제까지 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도록 한다고 믿습니다.

그동안 한국뿐 아니라 미국, 중국, 영국 등 해외 유명 갤러리에서의 전시를 비롯해 발로리스 비엔날레와 밀라노 트리엔날레, 아트 마이애미와 아부다비 아트페어 등 세계 주요 미술 무대에서 꾸준히 호평받으며 예술적 역량을 발휘하셨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이 해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제 작품을 멋지게 봐주시는 파트너들 덕분입니다. 작업을 열심히 하는 만큼 그 작업을 알아봐 주는 파트너를 만나는 일이 작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아 갈 때 쯤, 제 작업의 가능성을 믿고 지속해서 해외 시장에 소개 해주신 분들을 운 좋게 만났고, 그들이 쌓아놓은 역량 덕분에 좋은 기회를 접했습니다. 굳이 호평을 받은 작업적인 요소를 말하자면 이제까지 없었던 기법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자기를 평면화하는, 어쩌면 ‘도자기의 부정(否定)을 도자 기법으로 했다’는 직접적인 예술적 언어를 인정받았습니다.

<클레이젠(Clayzen)>, <기억(Memory)>, <타오(TAO)> 등 연작을 선보여 오셨는데 현재 새롭게 구상하고 있는 작업의 주제와 방향이 궁금합니다

작품의 제목에 큰 방향성이나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큰 의미로 보면 흙을 통해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고, 작품에 대한 고민과 흙 작업을 부단히 합니다. 예술 행위를 하는 작가로서 계속돼야 합니다. 늘 경계에 대해 생각합니다. 국경 지대에 선 사람처럼 애매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앞으로의 새로운 작업은 좀 더 언어를 축소해보려 합니다. 축소가 어떤 의미로는 확대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도자 이미지에 대한 사고를 해왔다면 이제는 이미지보다는 물성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가져볼 것입니다. ‘도자기 표면의 빛깔’에 집중하고 싶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도자기 표면은 미세한 빛에도 미묘하게 변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 점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번 개인전 이후, 어떤 구체적인 활동 계획이 있으십니까?

4월에 일본 교토에서 전시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불투명해졌습니다. 올 6월에는 서울 박여숙 화랑에서 개인전이, 7월에는 청주시립미술관의 로컬 프로젝트라는 릴레이 형식의 전시도 참여 예정입니다. 현재는 미국 뉴욕 워터폴 맨션&갤러리에서 기획한 전시에 참여해 4월 말까지 진행됩니다. 하반기 이후의 전시 일정은 조율 중입니다. 만일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지 않고 오래 지속된다면 올해는 한국에서만 작업 활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글을 정리하는 사이 중국에서 제작된 모든 작품이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클레이아크김해 미술관은 올해 상반기 기획전 준비를 모두 마친 채 현재 휴관 중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의 모든 일상을 바꿔놓고 있는 심각한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같은 상황이 속히 진정돼 <이승희: 2020 TAO> 전시를 어서 만나볼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작성일. 2020. 0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