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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무용단 <해변의 남자>
‘남자’를 벗어던진 남자들의 유쾌한 몸부림

사느냐 죽느냐. 이곳에는 무대 위에서 늘 고뇌에 차 있던 남자들이 없다. 대신 넥타이를 벗어 던지고 일탈을 즐기는 유쾌한 남자들이 있다. 툇마루무용단의 <해변의 남자>는 일상의 무게에 억눌린 남자들의 내면을 유머와 상상력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익숙한 음악에 맞춰 등장하는 코믹한 동작과 일상적인 에피소드들은 현대무용에 대한 편견을 가볍게 불식시킨다.

땀과 숨으로 살아나는 일탈의 상상력

침대에서 잠을 자는 남자는 시계 알람이 계속 울려도 못들은 척하다가 알람을 끄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거창하게 ‘현대인의 자화상’이라고 언급할 것도 없이 우리의 아침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를 마쳤지만, 회사로 가는 길도 순탄치 않다. 몸은 이미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녹초가 되고, 회사에서는 상사와 후배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다음날도 똑같이 반복될 나날에선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절로 나올 만한 일상이다.
툇마루무용단이 1995년 초연한 <해변의 남자>는 이처럼 현대인의 보편적인 일상을 토대로 자연스럽게 객석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 작품의 원제는 <넥타이 부대>였다. 당시 최청자 초대 예술감독이 TV나 신문도 여유롭게 볼 수 없는 샐러리맨의 바쁜 일상을 우연히 접하고 이를 소재로 만든 것이다. 이에 대한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좋아지자, 작품 배경을 해변으로 확장해 남자들의 연애, 사랑, 진정한 자유에 대한 욕망을 코믹한 감성으로 담아냈고, 그 결과 지금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변의 남자>를 가리키는 정체성이 ‘코믹한 현대무용’만은 아니다. 애초에 넥타이 부대가 해변에 오는 상상을 하는 것은 일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운명이 역설적인 전제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쳇바퀴 같은 일상을 버티기 위해 가끔 사회가 만든 통념에서 이탈해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자신을 상상하는 것이다.
<해변의 남자>가 극의 동력으로 삼는 것도 이 지점이다. 일상에서 벗어나는데 그치지 않고 벗어난 후에 행하는 발칙한 상상에 초점을 맞췄다. 대표적인 것이 ‘해변’ 하면 연상되는 비키니 차림의 여성 대신 남성 무용수들이 여장을하고 보여주는 퍼포먼스다. 남성 무용수들의 우스꽝스러운 복장과 과장된 몸짓은 그저 대중성의 일환으로 연출된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일 수 있다.
이 코믹한 일탈을 상상에서 현실로 실체화하는 것은 13명의 무용수가 보여 주는 생동감 넘치는 몸짓이다. 특히 넥타이를 벗어 던진 ‘해변의 남자’들은 그 옷차림의 변화처럼 한결 가벼운 움직임으로 관객들을 웃기고 들뜨게 만든다.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을 헐떡이며 유쾌한 상상을 육화(肉化)하는 무용수들의 모습은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헌사같기도 하다.

전 세계가 공감한, 남자들의 작은 반란

사실 1990년대의 국내에서 ‘일탈’이라는 콘셉트 아래 남성 무용수에게 화장과 여성 의상을 입히는 실험은 파격적이었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근육질 남자들이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해변을 살랑거리며 활보하는 장면은 예나 지금이나 관객들을 집중하게 만든다. 이런 복장이 ‘여자가 되고 싶다’ 혹은 ‘여자의 옷을 입으면 어떨까’라는 남성들의 자발적인 욕망에 기인한다면, 이는 이 작품이 21세기의 첨단 젠더 감수성을 당시에 이미 함축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동시대의 감성을 앞서간 현대무용(Contemporary Dance)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지난 세기에 창작된 <해변의 남자>가 지금까지도 스테디셀러로서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는 근본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진보성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현대무용’이라는 생각으로 무용단을 이끌어온 최청자 초대 예술감독의 철학에 기인한 바가 크다. 툇마루무용단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불림소리>도 1989년 초연 당시 가수 김수철의 작곡과 연주로 샤머니즘적인 굿을 등장시켜 원시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낸 파격의 결과물이었다. 이런 실험정신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 관객들의 열띤 호응으로 화답을 받았다. <해변의 남자> 역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초청돼 한국적인 정서를 전 세계에 소개하며 대중성과 예술성을 고루 인정받기도 했다.
비록 이 작품은 남성들의 고단한 내면만 다뤘지만, 사회인으로서 겪는 일상의 무게는 성별과 연령을 가리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 작품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리바이벌과 리메이크를 거치고 있다. 원래 20~30분짜리 공연이었던 원작은 최근 몇 년간 1시간 길이의 공연으로 재창작됐다. 이번 김해 공연은 초연에 참여했던 솔로이스트이자 현재 툇마루무용단을 이끄는 김형남 예술감독의 재안무로 이뤄진다. 또 차세대 주자인 김규진이 조안무로 참여해 최청자, 김형남에 이은 젊은 안무가의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할계획이다.
어느덧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지만, 툇마루무용단의 사계 연작 시리즈 중‘여름’에 해당하는 <해변의 남자>는 그 계절처럼 열정적이고 시원한 공연이다. 곡예를 연상시키는 공중회전과 역동적인 점프는 보는 것만으로도 여름을 느끼게 한다. 또 해변 영상을 배경으로 록과 재즈가 속도감 넘치는 동작과 맞물리면 해변의 정서는 어느새 객석까지 잠식한다. 발칙한 상상이 한바탕 휘몰아치고 나면, 깔끔하게 양복을 갖춰 입고 일상으로 돌아간 이들의 모습이 비친다. 무언의 몸짓으로 채운 1시간으로 일탈을 경험한 이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은 이들과 확연히 다를 때 무용을 넘어 한 편의 뮤지컬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일시 2019.11.22.(금) 19:30
장소 김해문화의전당 마루홀
연령 8세 이상 관람가
좌석 R석 20,000원 / S석 10,000원
문의 055-320-1234

글 송준호 공연 저널리스트
글 송준호 공연 저널리스트 사진제공 한필름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무용미학과 비평을 전공하고 주간 한국과 한국일보, 더뮤지컬을 거쳤다. 공연예술의 다양한 변화를 주시하며 대학에서 춤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작성일. 2019.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