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가시투성이었어. / 나는 미소를 지었지. /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김승희 시인의 시 구절을 읽다 보면 떠오르는 소설들이 있습니다. 삶이란 도대체 무얼까요? 이토록 고단하고,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동시에 담을 수 있다니요. 우리가 내딛고 있는 하루하루의 고단한 발걸음들도 성실하게 모아 붙이면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이 될 것은 자명합니다.
스토너
존 윌리엄스│소설│RHK│396p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
였다.” 윌리엄 스토너의 삶을 갈피갈피 넘겨봅니다. 놀랍게도 이 책은 아직 다 지나가지 않은 우리 인생의 완결판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스토너를, 우리 자신을 실패자로 말해선 안 되는 거라고 ‘삶이라는 것’에 대해 호들갑스럽지 않은 헌사를 들려줍니다.
밝은 밤
최은영│소설│문학동네│344p
“나를 데리고 늦가을에 대구로 피난을 가는데 어머니가 바들바들 떨던 것이 기억나요. 자꾸 농담을 하면서. 나는 어머니가 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떨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니는 평생이 그런 식이었죠.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손을 잡고 걸어갔어요.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어린 시절을 할머니와 함께 지낸 사람이라면 내내 할머니 생각을 하게 될 듯합니다. 어딘가 걸려 넘어질 때마다 따뜻하게 나를 잡아 일으켜준 그 기운이 바로 할머니였을 거라는 생각도 하게 될테고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건사하고 다독거리며 흘러와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닿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를 거쳐 우리의 딸과 손녀에게까지 다정하게 흘러가는 것도 보입니다.
아직 멀었다는 말
권여선│소설│문학동네│284p
“그러고보니 어제부터 오늘까지 그는 누군가의 인생을 일별하듯 아침, 오후, 저녁의 낮달을 모두 보았다. 왜 아침달, 낮달, 저녁달이 아니고 모두 낮달인지 생각하다, 해 뜨고 뜬 달은 죄다 낮달인 게지, 생각했다. 해는 늘 낮달만 만나고, 그러니 해 입장에서 밤에 뜨는 달은 영영 모르는 거지.” 장편은 인간이 겪는 사건을 쓰고, 단편은 사건을 겪는 인간을 그린다고 했던가요. 책을 읽다 보면 사건보다는 ‘인간’에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안아주고 싶은 사람들. ‘손톱’의 소희를 시작으로, 이제 할머니가 된 디엔, 재의 주인공과 제발트, 그레고르까지. 마지막으로는, 늘 그렇듯 소설 속 주인공과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있는 우리 자신까지 꼭 안아주는 일을 잊지 말아야겠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