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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김해청년시각예술인지원사업 작가 평론] (1) 이승연 작가
낯선 풍경
글.김진엽(미술평론가)
이제 이승연의 작업은 생명의 신비로 가득한 신화적 공간이 된다. 그 공간의 핵심 구성체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정해지지 않은 곳으로 뛰어 가고 위험한 곳도 거침없이 다가간다. 규제나 한계를 넘어서는 무의식적 열망에 가득 차 있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우리가 외면하는 소멸의 세계에도 다가서고 저편을 가로막는 강도 건너갈 수 있다. 아이들의 자유로운 세계는 유랑하는 의식이다. 달과 물 역시 유랑하고 있다. 동심의 세계와 우주의 보편적 질서를 연결하려는 그의 작업은 현재 시점에서는 명확히 정립되어 있지는 않다. 그만의 고유한 세계의 형성이 바로 작가가
앞으로 지향할 작업일 것이며, 더욱 다양한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1/ 이승연의 작품은 일단 편안함을 준다. 동심의 세계와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지며 다양한 색채의 하늘과 달이 다가온다. 화면에는 일상 풍경을 모티브로 소소하지만 포근한 삶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작가는 달을 생각하면 현기증이난다고 한다. 또 생명력 넘치는 화면에서도 죽음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본질을 직관했을 때 나오는 것이다. 세계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다만 세계 내에 머무는 존재일 뿐이다. 유한한 인간의 한계에서 우리는 어지러움과 고독을 느끼게 된다.

2/ 작업 중에서도 달의 형상이 눈에 띈다. 다양한 색채로 시시각각 표현되는 달은 하늘에 떠 있거나 놀이터에 떠 있거나 저편에서 또 홀로 화면의 중심에 떠 있다. 그의 달은 시각적으로는 정감이 넘친다. 그런데 그는 이면에 감추어진 의미를 얘기한다. “천체를 보며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아득한 시공간을 품은 우주를 상상한다”라는 그의 말처럼 달의 이면에는 생성과 소멸, 영원과 순간의 의미가 공존하고 있다.

달과 같은 구(球)는 생명의 근원이자 탄생과 죽음을 상징한다. 일종의 순환론으로, 우주는 그물망과 같아서 모든 생명체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반짝이는 별의 궤적을 더듬어 가면 궁극적으로 근원, 즉 생성과 소멸을 만나게 된다. 달은 실제로는 우주에 떠 있는 구 덩어리일 뿐이다. 환하게 비치는 달의 이면에는 생성과 명멸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물이다. <비눗방울과 달>, <series of human>은 물을 상징화한다. 허공과 우주를 떠다니는 비눗방울로 모든 것이 꿈이라는 허무적 맥락을, 물의 형태로 인간의 형상을 그려 세계와 우주의 심연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물 역시 순환한다. 한 줄기 물이 강으로 모여 바다로 흘러가고, 기화되어 비로 내린다. 그는 말한다. “생명이 죽은 후에야 근원으로 돌아가는 우주의 섭리가 신비하게 느껴지는 감정, 그것이 작업의 큰 테마다.”

3/ 이승연의 작업 소재 대부분은 아이들이다. 아이를 소재로 삼는 것은 동서양 미술에서 오래전부터 나타났는데, 서양화에서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천사에 투영해 상징화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아이를 현실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표현한다. 특히 몇 년 전에 태어난 조카를 관찰하면서 움직임을 그림에 담았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세밀한 묘사가 없음에도 형태가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아이들만의 몸짓을 표현하려고 했다. 아이들은 시시때때로 어딘가에 올라가고 매달리고 달리고 쳐다본다. 호기심, 흥분, 즐거움이 가득한 에너지를 내뿜으며 슬픔과 고통도 참거나 숨김없이 표현한다. 매우 빛나고 생생하다. 살아있는 것이 이런 거구나 싶은 강한 울림이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화면의 어린아이들은 무한한 상상력을 실현하는 주체로 나타나며, 작가는 동심의 시학과 예술적 상상력을 결합하여 자신만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화면이 맑고 깨끗하지만은 않고 쓸쓸하고 외로운 감정이 든다. 왜 그럴까?

작가는 달과 물처럼 아이들로 순환을 얘기한다. 죽음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아이들에게서 소멸을 생각하는 것은 기이하다. 그렇지만 그는 강한 생명력이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은 시간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화면을 자세히 보면 모래시계를 들고 놀고 있는 아이가 있다. 모래시계는 유한한 삶을 상징한다. 우리는 어떤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야지만 죽음을 생각한다. 작가의 불안은 충격에서 발생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존재 자체가 가진 불안이다. 존재자는 불안을 통해 비로소 존재 의미를 이해한다. 이러한 형체 없는 불안이 화면에 놓여 있다. 이러한 반어적 의미에서 작가의 예술적 사유가 펼쳐지는 것이다.

생명을 상징하는 아이들과 유한한 삶을 상징하는 모래시계, 과거의 유물, 죽어있는 동물들이 화면 사이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생명과 죽음을 극단적으로 대비하기보다 일본의 하이쿠처럼 담담하게 표현한다. 격동의 시학 대신 현실과 초월이 함께하는 서정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는 양립할 수 없는 순간과 영원의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하게 한다. 삶과 죽음은 교차하고 감싸면서 울림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를 감각으로 인지하기는 힘들다. 생명의 근원적 속성인 원점 회귀는 감각을 뛰어넘는 세계, 무의식의 깊은 심층에서만 느낄 수 있다.

4/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는 우주의 비밀스러운 자태를 포착할 수 있을까? 인간의 인식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예술적 상상력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 예술은 이편과 저편을 흐르는 강물이다. 인간은 그 강을 통해서 저편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예술을 매개로 신비한 우주를, 또 불가해한 우리의 존재를 순간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일상을 지배하는 경험의 세계에서 이질적인 흔적을 남기기 위해 아이들의 세계를 끌어들인다. 작가가 추구하는 ‘물의 실루엣’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동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김수로왕과 김씨 어린이>라는 작품에서 아이는 구멍 속의 세계를 들여다보려고 한다. 우리에게는 그저 미끄럼틀의 구멍이지만, 아이에게 그 구멍은 현실과 미지의 세계를 이어주는 웜홀 같은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현실과 환상은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5/ 존재의 섭리를 매개하는 동심, 동물, 물, 달 등에서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따져 묻기보다는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작가가 추구하는 생명은 존재론적인 의미에 가깝다. 현실을 낯설고 생경한 것으로 여기면서 더 깊은 의미의 숲으로 향하는 것은 과감한 투쟁 의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결단이 바로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고 ‘존재의 집’으로 향하게 한다.

작성일. 2024. 01.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