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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너머, 한국과 유럽 너머의 노래
아티스트 나윤선의 음악 세계
글.정병욱 대중음악평론가 사진.제공 NPLUG
한국에서 재즈는 대개 어려운 음악으로 인식된다. 재즈 분위기와 문화가 친숙하지 않아서, 실제로 쉽지 않은 재즈 이론
때문에, 혹은 섣불리 다가서기에 재즈 고유의 세계가 너무 방대해 보여서 주로 그렇다.
하지만 나윤선의 음악을 대할 땐 이러한 걱정을 내려놓아도 좋다. 그는 분명 한국 재즈를 대표하는 보컬리스트이지만,
재즈라는 영역 너머의 장르와 스타일로, 국적과 무대를 가리지 않고 자기 음악 세계를 만들어 왔다.
데뷔작 〈Reflect〉(2001)부터 지난해 발표한 11번째 정규 앨범 〈WAKING WORLD〉까지 꾸준히 새 작품과 자작곡을 내놓으며,
새로운 도전 역시 멈추지 않고 있지만, 그의 노래는 언제나 재즈와 무관한 감동과 매력을 전한다.

나윤선이 첫 앨범을 발표한 2000년대 초중반, 당시 한국 재즈가 지금보다 훨씬 불모지였을 때, 젊고 유망한 재즈 보컬로 차츰 이름을 알리며 국내 재즈 대중화를 이끌었다 일컬어지는 음악가들이 있다. 나윤선을 비롯해 말로와 웅산이 대표적인 이들. 세 사람은 각기 목소리와 출신, 성향과 소화하는 음악 스타일이 모두 달랐지만, 부지런히 작품과 무대 활동을 병행하며 비교 선상에 올랐고, 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약하며 지금까지 한국 재즈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고 있다. 가요로 데뷔해 미국에서 재즈를 공부했던 말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양국에서 인정받은 웅산과 달리, 나윤선은 뮤지컬 가수로 데뷔해 유럽에서 재즈를 익혔다. 유럽 최초의 재즈 스쿨인 프랑스 Le CIM(Centre d'informations musicales)에서 아시아인으로서 최초로 수학했고, 동시에 세 곳의 재즈 스쿨에 더 다니며 유럽 재즈를 습득했다. 이후 그의 경력은 화려하게 쌓아 올려졌다. 유럽 주요 콩쿠르와 페스티벌 수상, 귀국 후 한국에서 받은 여러 음악상과 예술가상을 비롯해 프랑스, 독일에서 골든 디스크를 수상하며 상업성도 인정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나윤선에게 문예공로훈장 슈발리에를 수여하기도 했다.

정규 앨범의 역사만 20년이 넘은 나윤선의 음악 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다만 유럽 재즈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인 나윤선의 음악성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펼쳐 왔다고 하면 절반의 설명은 될 거다. 대학 시절 전국 대학생 샹송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경력 초창기 뮤지컬, 음악극, CCM에 도전하기도 했던 그인 만큼 일찍이 ‘노래’에 대한 편견 없는 애정과 열정이 가득했다. 여기에 유럽에서 재즈를 공부하고 오랜 시간 활동하며, 미국 재즈와 한결 다른 미학과 매력을 발전시켜 나갔다. 재즈의 본고장 미국에서는, 아무래도 재즈를 낳고 그것의 주요 흐름을 이끌어간 흑인의 민족성이 강하게 가미된 음악을 선호해 왔다. 1930년대에 하나의 장르로서 재즈 대중화를 이끌었던, ‘스윙’(Swing)이라고 부르는 리듬과 강세, 뉘앙스가 한 축이었고, 이후 백인 댄스 문화의 들러리가 된 스윙 재즈를 넘어서고자 춤을 출 수 없는 복잡하고 화려한 즉흥 연주의 음악성을 강조하며 등장한 ‘비밥’(Bebop)이 또 하나의 축을 이뤘다. 반면에 유럽에 재즈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건 훨씬 이후다. 재즈가 탄생한 땅 루이지애나를 프랑스가 1803년 미국에 양도하며 재즈 탄생에 간접적으로 기여하기는 했지만, 나윤선이 다닌 유럽 최초의 재즈 스쿨 Le CIM만 해도 개교가 1976년이다. 미국에서도 이미 재즈가 다양한 분화를 낳고 있던 시점의 유럽 재즈는 미국인, 미국 흑인에게 익숙한 감성과 미학을 고스란히 답습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과거 수백 년 동안 유럽이 주요 무대였던 클래식 음악의 우아한 멋과 그것의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 음악의 전위적인 면모, 재즈의 주요한 특징인 즉흥 연주를 시도하면서도 작곡에도 높은 비중을 두는 태도가 특징이 되었다.

나윤선의 음악에서는 특정한 테크닉이나 분위기, 장르에 대한 집착이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재즈 팬도, 재즈 팬이 아닌 사람도 그의 음악을 흥미롭게 접할 수 있다. 재즈 보컬리스트로서 숙련된 스윙과 즉흥 연주를 훌륭히 구사하지만, 이는 미국 스윙이나 모던 재즈 시대의 흑인 거장들의 스타일과 거리가 멀다. 때때로 재즈가 맞나 싶을 만큼 차분하고 유려한 팝처럼 부르다가, 때로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한 장면처럼 전에 본적 없는 스캣을 선보인다. 앨범마다 악기 편성도 다르다. 정통 재즈에 어울리거나 자주 반복된 포맷을 반복하기보다 앨범의 주제와 콘셉트에 맞춰, 함께하는 연주자에 맞춰 구성과 초점이 달라진다. 때에 따라 루프 스테이션이나 뮤직박스와 같은 실험적이거나 아기자기한 악기도, 이국적인 사운드도 적극 활용한다. 재즈에 자주 쓰는 기존 곡의 활용과 변주에 있어 재즈와 팝의 숨은 스탠더드 곡만이 아니라 지미 헨드릭스, 메탈리카, 나인 인치 네일스 등 록스타들의 명곡을 두루 소화 했다. 7집 〈Same Girl〉(2010)에 ‘강원도 아리랑’을 수록하고, 2014년 소치 올림픽 폐막식에서 조수미, 이승철과 함께 아리랑을 부른 후 2015년 국립극장 제6회 여우락 페스티벌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라는 의미의 전통음악 재해석을 기반에 둔 음악 페스티벌)에서 음악 감독을 맡는 등 한국인의 정체성을 음악에 녹이는 작업을 이어 가기도 한다. 한국 대중이 그를 통해 재즈의 폭넓은 이면을 발견한 것처럼, 반대로 해외에서는 나윤선이 한국 재즈를 대표하는 신선한 얼굴이자 목소리였다.

중요한 건 이처럼 갈수록 높아가는 위상 및 자유분방하게 확장해 가는 음악 세계와 별개로, 나윤선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지향점에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작곡가이자 작사가로서 작품과 무대마다, 해마다 재즈의 영역을 한정 짓지 않은 채 여러 장르와 실험을 시도해 이지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러면서도 결국 가수이자 보컬리스트로서 자기 목소리로 멋진 노래, 듣는 이에게 감동을 주는 노래를 부르는 걸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는 경우에도 어려운 화성보다 멜로디를 선명하게 드러낼 때가 많고, 편안하든 강렬하든 의도한 분위기에 따라 보컬을 다채롭게 연출할 때에도 섬세한 편곡과 메시지를 곁들여 충분한 공감을 준다. 내년 초 발매할 12집 〈Elles〉는 대중에 보다 친숙한 곡들로 채워질 것임을 예고했다. 재즈와 팝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위대한 보컬리스트들은 늘 그랬다. 장르 너머, 시간과 장소 너머의 ‘노래’로 남고는 했다.

작성일. 2023.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