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고집스러운 한 작가의 장비-타협-불가 선언이라는 개인적 사건에 기반한 픽션이다.
01.
아마 13에서 15인치 맥북프로 혹은 27에서 32인치 모니터에 맥프로를 연결해 제작되었을 이 영상작품은 작가의 작업실을 벗어나 고 사양의 프로젝터를 통해 미술관에 거대하게 영사됨으로써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한다.
02.
작품의 최초 감상자였을 작가는 그의 작은 모니터를 통해 이런저런 수정을 해 보고 만족스러운 결론에 이르렀을 때 최종 파일 추출 버튼을 누른다. 4K 해상도로 추출하려니 컴퓨터가 버거워한다(이번 전시에서 받은 작가비로 새로운 장비를 구매해야 하겠다). 시끄럽게 돌아가는 컴퓨터의 팬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미술관이 자신에게 할당한 공간에 이 작품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한다. 애초에 작가 자신도 고사양의 장비를 통해 이 작품을 시연해 보지 않았기에 그의 감과 경험에 이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03.
작품의 최종 파일 추출이 끝나고 이제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를 켠다. 추출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컴퓨터가 아직도 뜨겁다. 작가는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작품 설치 설명서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검정 페인트를 칠한 암흑의 방 안에는 진한 회색의 카펫이 깔림으로써 소리의 반사를 줄여주어야 한다. 작품의 스크린은 육각형을 반으로 자른 모습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세 대의 프로젝터는 모두 같은 모델이어야 하며 렌즈 사용 시간에 따라 색감이 다를 수 있으므로 가능하다면 새 렌즈로 교체해야 한다. 프로젝터 자체는 눈에 띄면 안 되기에 공중에 매달아야 하며 프로젝터의 색은 검정이어야 한다. 선호하는 스피커의 모델도 작품 설치 설명서에 적어 두었으니 정확히 그 모델은 아니더라도 같은 급의 스피커를 사용해야 한다(그는 정확히 그 모델을 사용하지는 않아도 된다고 말함으로써 꽤 합리적인 작가로 여겨질 것이다).
04.
작가는 약 10GB 크기의 작품 최종 파일을 구글 드라이브에 올린 후 그 링크를 이메일에 복사-붙여넣기하고 작품 설치 설명서를 첨부해 미술관에 전송한다.
많은 영상 작품의 경우 작가 소장용 에디션(Artists Proof, A.P.)을 포함하여 복수의 에디션이 존재한다. 나는 이 에디션에 지속 가능한 에디션(Sustainable Edition, S.E.)을 추가하자고 제안해 본다. S.E.의 작품 설치 설명서에는 작품을 재생 할 수 있는 최소 사양이 적혀있으며 최소한의 전시장 공사만을 허용한다(되도록 미술관의 구조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카펫은 필요 없다. 프로젝터의 모양이나 색은 상관없지만 적어도 작품의 색감은 잘 나타낼 수 있는 정도의 프로젝터면 된다. 굳이 중력을 거스르지 않아도 되겠다. 바닥에 프로젝터를 놓거나 모니터를 벽에 기대어 놓아도 되지 않을까. 육각형을 반으로 자른 모양의 스크린은 사실 기다란 평면 스크린이어도 되는 것이었다. 에너지 소비효율등급이 높은 모니터를 활용하거나 13인치나 15인치 맥북프로를 통해 재생함으로써 작품의 태초의 모습을 감상자들과 공유해도 좋겠다. 그렇다면 Full HD 파일로도 충분하다. S.E.는 영상 작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작품 그리고 더 나아가 전시나 일상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한 일을 해 보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작가의 창작 활동이나 감상자의 문화권에 제한을 두자는 건 더욱 아니다. 모두가 조금만 아량을 가지고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해 보자.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기후 위기 관련 유네스코 보고서의 제목이 생각난다. 변해야 할 것은 기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라고.
Changing minds,
not the climate.
* 같은 그림을 두 가지의 재료로 각각 제작한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그림을 그릴 때 전문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아크릴릭 과슈와 친환경 물감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