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문화도시 지정
김해시가 법정 문화도시로 지정되었다. 경남 최초, 가야문화권 최초, 역사전통 중심형 최초의 법정 문화도시라고 한다. 지난해 한 차례 탈락 후 재도전이었기에 더욱 간절하기도 했고, 그 과정 속에 함께 참여하면서 애정을 쏟고 힘을 보탰던 일이기에 마치 내가 상을 받은 것처럼 기쁨과 성취감을 느낀다. 문화도시에 이렇게도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문화도시에서 말하는 ‘문화’가 흔히 생각하는 ‘문화예술’이 아닌, ‘사회 전반의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라는 점과, 그 문화가 전문가, 힘을 가진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문화도시는 시민이 공감하고 즐기는 도시문화의 고유성과 창조력을 바탕으로 한다.”고 소개하고 있고, 김해문화도시센터 이영준 센터장은 “김해의 문화도시는 시민을 중심에 두고 역사와 미래의 가치를 담는다.”며 ‘시민들의 힘으로 문화도시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경남 최초, 가야문화권 최초, 역사전통 중심형 최초라는 것보다, 5년간 최대 200억 원이라는 예산이 들어올 것이라는 것보다, 문화도시 사업의 중심에 시민이 있고, 시민들과 함께, 시민들에 의해서 만들어 갈 것이라는 점에서 문화도시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크다.
시민 참여
사실 ‘시민 참여’, ‘시민 주도’라는 개념 자체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요즘은 시민 참여 기반이 아닌 정책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단순히 유행을 넘어 하나의 정책 원칙으로 자리 잡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혁신, 주민자치, 도시재생, 농어촌 활성화, 주민참여 예산, 지속가능발전, 마을교육공동체, 마을공동체, 법이나 조례를 통해 설치 운영되는 각종 위원회 등 다양한 정책, 사업, 거버넌스 기구들이 모두 시민 참여, 시민 주도를 기조로 하고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업에서 왜 시민 참여가 중요한지 의미와 이유를 놓치고 형식만 갖춘 시민 참여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들의 자원 봉사를 기반으로 하는 사업으로 이해하고 있거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 사업을 하는 수준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그조차도 용역회사가 아닌 시민들이 공모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행정적 절차와 기준을 준비하지 못해서 시민들에게 사업자등록을 요구하고 ‘시민’이 아닌 ‘업자’를 양성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시민들은 계속해서 ‘동원’되고 있다고 불만을 외치고, 행정에서는 ‘참여하는 시민들이 없다’, ‘시민들의 역량이 부족하다’며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참여의 사다리
아른스테인(S. Arnstein)의 참여의 사다리라는 이론이 있다. 아른스테인은 시민 참여를 1) 조작 2) 처방 3) 정보제공 4) 협의 5) 회유 6) 파트너십 7) 권한 위임 8) 주민 통제의 8수준으로 나누고, 1)과 2)는 비참여, 3)~5)는 명목적 참여, 6)~8)은 참여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각 수준별 상세한 내용을 일일이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시민 참여가 그 수준에 따라 구분될 수 있고 비참여, 명목적인 참여, 실질적인 참여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점과 실질적인 참여가 되기 위한 조건이 ‘시민의 결정권’에 있다는 점을 함께 짚어보고자 한다. ‘시민 참여’를 강조하는 것은 시민이 전문가에 비해 더 뛰어난 기획력과 전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시민 참여는 효율성이 아닌 당위성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하고 뻔한 이야기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다루고자 하는 문제 자체가 시민들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겪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시민들의 ‘입장’에서 출발해야 하고, 그 방향성을 시민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정조직에 의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설정되고, 해결 방향이 결정되어 왔던 것을 시민들이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 방향을 결정하게 하자는 것이 시민 참여의 본질이다. 시민이 기획력이나 업무추진능력이 더 뛰어나서도 아니고, 그런 뛰어난 역량을 갖춘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하기 때문도 아니다. ‘시민’이기 때문에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의사결정을 시민이 하든, 행정이 하든, 일을 실제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필요하다. 보통은 전문가에게 용역을 줘서 일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고, 만약 시민들이 진행 과정에 참여하려면 시민들 역시 이를 위한 전문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시민 참여의 실태
이제 우리 사회의 ‘시민 참여’의 실태를 살펴보자. 첫 번째는 의사 결정권을 주지 않는 비참여 또는 명목적인 참여의 형태가 많다. 시민들에게 의사결정권을 주는 것을 여전히 낯설어하고 두려워한다. 시민들에게 결정을 맡기면 잘못될 것만 같고 시민들이 책임은 지지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시민 참여’를 안 할 수는 없으니 이미 결정된 내용을 알리기만 하거나, 정해진 내용으로 유도하거나, 결정된 내용을 진행하는 일에 시민들을 ‘동원’하는 비참여 혹은 명목적인 참여의 형태로 진행하고 만다.
두 번째 경우는 방법을 몰라서 못하는 경우이다. 시민들의 의사결정은 행정의 의사결정처럼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논의하고 협의하는 과정을 거쳐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도 필요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다루기 위한 방법과 기술도 필요한데, 이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컨설팅회사의 용역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세 번째는 시민 역량강화로부터 출발하려는 것이다. ‘시민 참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시민들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역량 강화를 하고나야 ‘시민 참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시각이다. 시민들을 진행 과정에 참여시키고자 한다면 당연히 일을 할 수 있는 실무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이 필요할 것이나, 의사결정에 참여할 때는 그렇지 않다. 선거를 할 때 온 국민에게 역량강화 교육을 하고 투표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왕의 도시에서 시민들의 도시로’
문화도시 지정을 준비하는 시민 토론회에서 나왔던 말이다. ‘가야 왕도’라는 김해의 브랜드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논의하다보니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를 발견하게 되었다. 왕을 선출했던 가야의 민주주의에서 노무현 대통령까지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키워드가 김해를 관통하고 있다고 보았고, 가야왕도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왕의 도시가 아닌 ‘시민들의 도시’가 되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비록 김해문화도시 계획서에 그대로 담기지는 않았지만, 함께 참여했던 시민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슬로건이다.
문화도시 김해가 꿈꾸는 ‘오래된 미래’는 다름 아닌 ‘시민들의 도시 김해’라고 생각한다. 시민을 중심에 두고, 시민들의 힘으로 여는 문화도시는 기존의 다른 정책들이 형식적으로 해왔던 시민 참여를 극복하고, 실질적인 시민 참여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 한다.
지난 2년 동안의 예비사업을 통해 경험하고 준비해왔으며, 민주시민교육 조례, 문화다양성 조례, 공익활동 지원 조례 등 제도적 틀을 갖추었다. 이런 경험과 제도적 기반까지 갖추고 있는 도시는 전국 어디에도 없다.
가시적인 사업 실적과 성과에 집중하지 말고,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시민들에게 얼마나 많은 권한이 주어지고, 시민에 의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눈여겨보기 바란다. 문화도시가 단순히 문화예술과 소관 사업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생활양식을 다루는 통합정책이 되기를 바라며 이를 통해 시민 참여 기반의 다양한 정책과 시도들이 실질적 시민 참여로 변화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