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당초 이 구절은 매우 아름다운 내용이다. 조선 정조 때 유한준이라는 사람이 썼다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문장으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언급되면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하지만 2020년에 이 문장의 아름다운 부분은 다 사라지고 마지막 부분만 남은 듯하다. 마치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가 선물로 받은 상자를 열었더니 모든 고통과 질병이 튀어나온 뒤 바닥에는 ‘희망’ 한 단어만 남아있었다는 것처럼, 역병이 튀어나온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지금 ‘가냘픈 희망’만이 남아있다. 그 희망은 백신이 잘 듣고 치료 약이 효과를 발휘하면 ‘잃어버린’ 일상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온 세상이 과연 전과 같을까. 누구도 전과 같을 거라고 예상하지는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는 전에 없는 물리적 거리가 생겼다. 거의 모든 분야에 질병이 영향을 끼쳤으니 어느 한 분야라고 더 힘들다 하소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실내 공연장은 단계가 올라가고 내려갈 때마다 들쑥날쑥 띄어 앉았다 붙어 앉았다, 문을 닫았다가 열기를 거듭하며 많은 공연이 취소 또는 조기 종연하거나 미루어 졌다.
런던의 공연계 웨스트엔드(West End)에서는 정부가 내리는 봉쇄 조치에 굴하지 않고 지속해서 극장 문을 열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조금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시험 삼아 문을 열어보는 식이다. 뮤지컬의 본고장인 런던에서도 볼 수 없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나 <캣츠>의 투어 팀이 공연 중인 한국의 방역 모델은 런던을 비롯한 해외 공연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런던에서는 한국식 방역 모델을 도입해 이머시브 공연(관객 참여형 공연)인 <위대한 개츠비>를 상연해 보았다가 마스크를 쓰고 사방으로 띄어 앉은 관객과 커다랗게 X 사인을 붙여놓은 빈 객석을 보며 온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는 배우들의 고통에 찬 후일담이 올라오기도 했다. 결국 <위대한 개츠비>는 영국의 한국형 방역 모델 따라 하기의 실패 사례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웨스트엔드는 실패한 결과를 하나의 사례로 미뤄두고 어떻게 하면 다시 극장 문을 열 수 있을까 고민하며 한편으로는 정부가 주체가 되는 극장 보험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사정은 뉴욕도 다르지 않다. 겉으로 보면 브로드웨이는 극장 문을 얌전히 걸어 잠그고 내년 5월까지 모든 공연을 미룬 상태다. 마치 코로나19의 위협에 조용히 굴한 듯이 보이지만 뉴욕의 공연계라고 해서 그저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는다. 현재 뉴욕의 다운타운 지역인 웨스트 빌리지에서는 불안한 실내가 아닌 실외 길거리를 관객과 함께 누비는 거리 위의 이머시브 공연 <Voyeur>를 시작해 11월 30일(월)까지 티켓을 팔았다. 코로나19의 확산 여부에 주시하며 12월까지 티켓 판매를 확대했다. 이 공연은 티켓을 사지 않은 사람도 응원의 박수와 함께 거리 너머에서 공연을 보며 공연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작품은 벨레폭 시절의 파리를 배경으로 파리 분위기를 가장 비슷하게 재현할 수 있는 웨스트 빌리지를 무대로 삼았다. 전체 제목은 <Voyeur: The Windows of Toulouse-Lautrec(툴루즈 로트렉의 창 안을 탐험하는 뱃사공)>으로 연기자들이 건물 안과 밖을 넘나들며 관객을 유혹하고 끌어들인다. (옆 페이지 사진 참조)
런던의 웨스트엔드와 뉴욕의 공연계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관객 참여형 공연이면서 넓은 공간이나 야외가 있어야 하는 이머시브 공연을 통해 관객간의 거리와 안전을 확보하려는 시도다. 반면 떼어냈던 객석을 원상 복구 시키고 다시 실내 공연으로 돌아간 독일의 베를리너즈 앙상블의 공연 소식은 또 다르다. 독일은 콘서트 공연장에서 관객 실험을 한 바 있다. 건강한 지원자들을 각각 다른 상황으로 분류해 세 번의 대규모 콘서트를 열고 개인의 전염 상태를 추적한 실험이었다. 공연 시 안전 확보에 필요한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보고 바이러스 확산의 확률을 추적했다. 실험의 결과는 9월에 나왔다. ‘리스타트19’라고 명명된 실험 결과에 따르면 마스크와 소독, 세척 등의 핵심 방역 요소를 제대로 한다면 바이러스 감염자가 관객 중에 섞여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대규모 콘서트 등을 열 수 있다는 결과였다. 하지만 들뜬 마음도 잠시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중부 유럽은 다시 늘어난 확진자의 숫자로 극장은 물론 술집이나 레스토랑 등도 21시 이후로 걸어 잠그며 봉쇄에 들어간 상황이다. 겨울이 시작되고 있고, 초기 코로나19가 발생했던 악몽이 다시 밀려오고 있다. 그러나 극장들은 다시 초반처럼 객석을 들어내는 등의 드라마틱한 조처를 하지 않고 차분히 이 시기가 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한국의 상황은 유럽이나 미국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다. 하지만 국공립 극장에서 내정된 공연들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1.5단계로 올라가면 바로 취소되거나 미루어지기 일쑤라 여전히 앞날은 보이지 않는다. 이 와중에 한국의 공연 제작자들도 팬층이 두꺼운 뮤지컬을 필두로 유료 스트리밍을 확장하고 있다. 어떻게든 공연을 팔아야 한다는 몸부림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 극장의 존재 가치 여부에 대한 두려움이 올라온다. 올해 처음 학교에 들어간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은 학교에 가야 하는 이유가 과거의 학생들에 비하면 옅어질 수밖에 없다. 극장은 낯선 이들이 좁고 어두운 공간에 모여 하나의 목표를 위해 두 시간을 감내하는 공간이다. 그러한 감내의 시간이 낯설어지고 있고, 라이브 공연이라는 마지막 가치를 기치로 내세웠던 공연 마저 스트리밍 서비스로 옮겨간다면 궁극적으로는 ‘극장’의 존재도 완전히 다른 모습, 즉 객석은 없는 스튜디오의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다. 라이브 공연의 종말은 극장의 종말이다. 2020년은 온통 코로나19였다. 극장을 살려줄 가냘픈 희망이 2021년에 만발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