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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처럼 로맨틱하고 감상적인 로렌스 알마 타데마의 회화
이주헌의 미술책장

19세기 영국에서는 화사한 봄날처럼 로맨틱하고 감상적인 회화가 활짝 꽃피었다. 이 회화를 ‘빅토리아조의 회화(Victorian Painting)’라 부른다. 1819년에 태어나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재위한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가 이 시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그 낭만성과 ‘센티멘털리즘’을 대표하는 중요한 화가의 한 사람이 로렌스 알마 타데마(1836~1912)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의 작품이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라이벌>(1893)을 통해 알아보자. 저 멀리 청명한 하늘이 펼쳐지고 바다도 그 못지않은 푸르름을 자랑한다. 그림의 배경은 고대 로마의 한 실내 공간이다. 지중해의 빛이 기세를 한풀 꺾고 들어오는, 차분하면서도 화사한 로마의 한 실내에서 소녀들과 꽃, 그리고 대리석 조각이 서로 아름다움을 겨루고 있다. 낙원 같다고 해야 할까, 맑고 투명한 공기와 우리의 눈에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수려한 색채는 할 수만 있다면 우리도 그림 속의 장소에 머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게 한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는 빅토리아조 화가들 가운데 당대에 가장 인기가 있고 작품 가격도 매우 높았던 화가다. 그는 1836년 네덜란드 드론리프에서 공증인인 아버지 피터르 타데마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힌케 브로우베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불과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일찍부터 미술에 재능을 드러내 보인 알마 타데마는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벨기에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중 자신의 그림이 특히 영국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지자 1870년 영국으로 이주했고, 1873년 귀화해 영국 시민이 되었다. 이후 1899년 기사 작위를 받기까지 그는 대표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로서 어떤 영국인 화가 못지않게 우아하면서도 관능적인 빅토리아조 회화의 감수성을 표현해내게 된다.

<라이벌>로 다시 시선을 돌려보자. 제목이 ‘라이벌’이다 보니 자연히 우리의 시선은 그림 속 두 여인에게 쏠린다. 고대 로마인의 복장이지만, 두 여인에게는 현대 여성의 당차고도 개방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낭만적인 지중해 풍경 속에서 이 매력적인 두 여인이 경쟁 관계에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사랑의 경쟁일 것이다. 맨 왼쪽의 아이 조각이 사랑의 신 큐피드인 까닭에 우리는 그림 속의 상황을 그렇게 단정할 수 있다. 큐피드가 지금 얼굴에 쓰고 노는 것은 비극의 가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경쟁의 결말을 다소 우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비극이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삼각관계의 두 꼭짓점인 여인들과 이어지는 다른 한 꼭짓점, 남자는 어디있나? 오른쪽 발만 보이는 대리석 조각이 지금 보이지 않는 그 남자를 상징하는 듯하다. 마치 가만히 앉아 두 여인의 경쟁을 즐기는 듯한 대리석 조각. 이런 포즈의 고전 조각들을 놓고 유추해 보건대, 그는 검투사 아니면 술의 신 디오니소스(바쿠스) 같다. 오늘날로 치자면 전자는 스포츠 스타, 후자는 연예계 스타쯤 된다고나 할까? 소녀들이 동경할 만한 멋진 남성이다.

분명 이 여인들 가슴에는 사랑의 울렁임과 동경, 그리움이 흐르고 있다. 봄도, 사랑도 제철만 되면 그럴 수 없이 밝고 화사한 빛으로 다가오지만, 그것들이 다가올 때면 우리의 마음 또한 봄바람 같은 울렁임과 동경, 그리움으로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나비, 꽃 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그 섭리가 나른하도록 아름다운 낙원에서 펼쳐지는 그림이 바로 알마 타데마의 <라이벌>인 것이다.

이 그림이 시사하듯 알마 타데마는 주로 고대 로마를 그림의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다. 당대보다는 고대를 배경으로 함으로써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더욱 로맨틱한 정서와 관능적인 조형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가 1883년에 그린 <반가운 발자국 소리>도 그런 특징을 잘 드러낸다. 역시 아름다운 고대의 정취와 사랑의 설렘을 맛볼 수 있다.

실내를 중심으로 한 그림이지만, 문 바깥으로 비치는 실외 풍경도 이 그림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먼저 실내부터 살펴보자. 문간에 기다란 벤치형의 의자가 있고 그 의자에는 호랑이 가죽이 덮여 있다. 의자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는데, 그녀는 지금 몸을 문 쪽으로 기울이고 있다. 사랑하는 남자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천으로 한구석을 살짝 가린 문밖으로는 지금 남자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그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다. 혹 놓칠세라 꽃을 고이 모셔 들고 오는 그의 모습이 아주 진중해 보인다.

그 옆으로 언뜻 보이는 하얀 대리석상은 목양의 신인 파우누스다. 전원의 낭만을 더해주는 그 목가적인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이들의 사랑이 매우 낭만적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남자가 문에 들어설 무렵이면 여인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몸을 꼿꼿이 세울 것이다. 꽃다발을 바라보며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일 것이다. 남자는 다소 더듬거리는 말투로 사랑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러면 여인은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져 당황스럽다는 듯,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듯 한발 뒤로 물러설 것이다. 남자는 그럴수록 더욱 그녀에게 매달리고 그녀는 못 이기는 척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것이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는 이처럼 고대를 배경으로 영원하고도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를 아름답게 형상화했다.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정서를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표현했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통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정서는 차이가 없고 인간이 추구하고 성취하려는 사랑과 행복의 표정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옛 로마 사람도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가지고 있었고, 우리와 같은 격정과 감상에 흔들리며 살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표현하려고 늘 애썼다.” 이런 보편적인 사랑의 이미지를 푸근하고 따뜻한 붓으로 형상화한 까닭에 그의 그림은 많은 사람에게 늘 따뜻하게 받아들여졌다

작성일. 2020. 0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