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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미술을 세계에 널리 알린 벽화운동과 프리다 칼로
이주헌의 미술책장

                                                                                           디에고 리베라, 범 미주 통일 벽화, 1940, 프레스코, 670x2260cm, 샌프란시스코 시립대학

멕시코의 현대미술은 멕시코 혁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프리다 칼로, 부서진 기둥, 1944, 캔버스에 유채, 40×30.7cm, 돌로레스 올메도 컬렉션 아니다. 멕시코 혁명에 대해 멕시코의 문호 옥타비오 파스는 이렇게 말했다. “20세기의 혁명 가운데 멕시코 혁명만큼 독특한 것도 없을 것이다. 멕시코 혁명은 이념 혁명이 아니라 민족주의적인 농민 반란이었다. 특정한당이 이끈 것도 아니고 미리 준비된 프로그램도 없었다. 다수의 지도자에 의해 여기저기서 일어난 민중 폭발이었다.” 1910년에 발화된 멕시코 혁명은 이듬해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30여년에 걸친 장기집권을 끝장낸 뒤 여러 당파가 서로 합종연횡하고 내치는 피의 투쟁을 거치며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연방군과 반군의 산발적인 투쟁을 거친 뒤 1934년 개혁주의자 라사로 카르데나스가 집권해 멕시코 혁명 동안 추구되고 1917년 헌법으로 법제화된 개혁을 제도화해나감으로써 사회는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 같은 혁명과 투쟁의 과정을 거쳐 멕시코인들은 자연스럽게 서구에 종속적이었던 지배문화를 반성하고 유럽에 의한 식민화 이전 시기의 인디오 문화에 젖줄을 댄 새로운 정체성을 일궈냈다. 자신의 땅에 뿌리를 둔 민족 주의가 새롭게 다져지자 멕시코에는 곧 엄청난 문화 르네상스가 뒤따랐다. 당시 미국 미술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멕시코 벽화운동이 그 중심이 되었다. 어쩌면 20세기 초의 멕시코는 바로 이 벽화들에 의해 가장 또렷이 기억되고 영원한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고 할 만큼 멕시코 벽화운동은 20세기 문화사의 거대한 기념비로 우뚝 섰다. 1920년대 초부터 시작된 멕시코 벽화운동의 대가로 불리는 대표적인 세 작가로는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가꼽힌다. 이 세 사람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큰 화가가 디에고 리베라였는데, 그는 유럽 미술의 전통과 멕시코의 문화 전통을 결합하려 애썼고 그만큼 독자적이고 강렬한 아우라로 빛나는 작품들을 다수 남겼다.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 대가들의 벽화에 큰 감명을 받아 이를 마야 문명의 신화와 역사, 그리고 멕시코 민중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조형의 기초로 삼았다. 당시 그 남다른 비전과 표현에 미국과 유럽의 미술인들도 크게 매료되었다

왕성한 창조력만큼이나 여성들과의 염문으로도 유명했던 디에고 리베라는 화가 프리다 칼로와 결혼과 이혼, 재결합을 반복함으로써 평탄하지 않은 가정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평생 서로를 깊이 사랑했고, 특히 프리다 칼로가 사후 페미니즘 미술의 부상과 함께 전 세계적인 예술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면서 오늘날 멕시코가 낳은 가장 유명한 미술인 ‘투 톱’ 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프리다 칼로, 부서진 기둥, 1944, 캔버스에 유채, 40×30.7cm, 돌로레스 올메도 컬렉션

프리다 칼로는 1907년 멕시코의 코요아칸에서 독일 혈통의 사진사 곤잘로기예르모 칼로와 멕시코인 어머니 마틸드 칼데론 이 곤살레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의 최고 명문인 국립 예비학교에 입학해 의사를 꿈꾸었으나 1925년 큰 교통사고를 당해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와 충돌해 엄청난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녀의 대퇴골과 갈비뼈가 부러졌고, 골반은 세 군데, 왼쪽 다리는 열한 군데가 골절됐다. 오른쪽 발은 아예 으스러졌는가 하면, 왼쪽 어깨는 탈구되었다. 버스 난간이 배를 뚫고 들어와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로 그녀의 상태는 처절했다. 끝내 살아남았으나 그녀는 이후 47세의 나이에 요절하기까지 육체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던 중 한 지인에게 프리다 칼로는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런 날들이 계속된다면 차라리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부서진 기둥>(1944)은 프리다 칼로가 평생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황량한 땅과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프리다 칼로. 갈라지고 파인 대지의 모습이 그녀의 처지와 유사하다. 여신상처럼 서 있는 칼로는 척추 대신 옛 그리스 신전 기둥을 지지대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기둥 또한 이미 금이 가 쪼개져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인은 쇠 띠로 몸을 동여맸다. 이 무렵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칼로는 몸을 추스르기 위해 그림에 그려진 것과 같은 코르셋을 입고 다녀야 했다고 한다. 그녀의 살 이곳저곳에는 못이 촘촘히 박혀 있어 신체 어느 한구석 편한 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비 오듯 쏟아지는 눈물은 그만큼 한스러운 삶의 표현이라 하겠는데 보는 관객도, 화가 자신도 이 눈물을 덜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그림이 시사하듯 칼로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평생 예술적 주제는 오로지 자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물론 틈틈이 주변 인물 등 다른 주제에 손을 대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결코 자화상에 미치지 못한다. 칼로는 평생 자신을 그리는 데 모든 열과 성을 바쳤고, 자신을 모델로 삼아 끊임없이 관찰하고 표현했다. 프리다 칼로는 왜 이렇게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했을까? 그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도 자주 외롭고 또 무엇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 때문이다.”

프리다 칼로가 화가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8년 초현실주의의 지도자 앙드레 브르통에게 발견되고 뉴욕의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가지면서부터다. 1939년 앙드레 브르통의 후원으로 파리의 피에르콜르 화랑에서 전시를 열었을 때는 피카소, 칸딘스키 등 당대의 대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이 해 남미 출신 화가로는 최초로 루브르에 작품이 소장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녀는 자신을 초현실주의자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상상력만큼은 그 어떤 초현실주의자 못지않은, 신선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줬다.

화가로 활동하던 초기에는 워낙 유명한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명성에 묻혀예술가로서 그녀의 재능이 세상에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디에고 리베라뿐 아니라 다른 많은 예술가를 깊이 매료시켰다. 서구 페미니즘 운동이 성장한 1970년대 이후에는 페미니즘 미술의 중요한 선구자로 재평가되기도 했다. 자화상을 통해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날카롭게 파헤쳤다는 점이 무엇보다 높이 평가된 것이라 하겠다. 죽음을 앞두고 쓴 마지막 일기에 프리다 칼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적어 넣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작성일. 2019. 0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