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길가에 ‘조문제 스트링’이라는 곳이 눈길을 끈다. 내부에 발을 내딛자 나무 냄새가 코끝을 파고든다. 자신의 이름을 내 건 공방답게, 직접 만든 바이올린과 첼로가 줄지어 서 있다.
배움을 위한 비행의 시작
지금은 제작자라는 게 퍽 어울리지만, 조문제 대표는 대학 때까지 바이올린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러다 누구에게나처럼 진로선택의 시간이 왔고, 무대에 서는 게 두려웠던 조문제 대표는 바이올린 연주를 뒤로하고 제작자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음악에서 벗어나는 길은 선택하고 싶지 않았어요. 직접적으로 음악을 다루지 않아도, 악기를 제작하는 것 역시 음악의 범주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작자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은 조문제 대표는 어디에서 배움을 익혀나갈지 찾아 나섰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때라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그는 고민 끝에 이탈리아 크레모나 국립 현악기 제작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기초과정인 1~2학년을 건너뛰고 바로 전문과정인 3학년 수업을 들었다. 바로 전문과정을 들었지만, 그의 스승인 빈센초 비솔로티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스승은 처음 악기를 제작하는 데도 능숙한 조문제 대표를 보며, 악기 제작을 해봤는지 물을 정도로 그를 칭찬했다.
매순간 호기심이 일었던 제작 과정
처음부터 실력을 인정받을 만큼 재능이 있었기에 배움의 즐거움이 컸을 수도 있지만, 조문제 대표는 악기를 제작하는 과정 자체를 좋아했다. “악기 제작은 과정이 눈앞에 보여서 좋아요. 대패질을 하면 하는 만큼 대팻밥이 수북이 쌓이고, 어떤 나무를 조각하면 변하는 모습이 바로 보이니까 그것이 주는 희열이 있어요.”
조문제 대표는 밤을 새워 제작 공부를 할 때도 힘든 것보다 한 과정 과정이 궁금하고 기다려졌다고. 접착을 하게 되면 그 부분이 말랐을 때 어떨지 궁금해하며 호기심 속에 배움의 시간을 보냈다. 노력의 시간을 보낸 끝에 조문제 대표는 크레모나 국립 현악기 제작 학교 한국인 1세대라는 영광을 안고 졸업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부산의 한 공방에서 제작자로서 일하게 됐다. 유명한 학교를 졸업 했으니 서울에서 일할 법도 한데, 다시 부산에 돌아온 것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서울에 집중돼 있으니 가면 좋았겠지만, 부산이 고향인 조문제 대표는 ‘한 번도 서울에 가야겠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단다.
“제가 부산에서 일하던 2000년도만 해도 악기를 제작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던 터라 수리를 주로 했었지만, 어느덧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악기 제작에 대한 인식도 조금은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로망을 꾹꾹 눌러 담은 공방
2009년 부산에서 터를 잡고, 1호 조문제 스트링을 운영해오다 김해로 발을 넓혔다. 김해로 옮기고 보니, 공방의 분위기와 도시가 잘 어울린다고 느낀다고. 그렇게 김해라는 도시에 정을 붙이고 자신의 로망을 가득 채워 공방을 만들었다. “김해가 ‘국제슬로시티’라고 하는데 악기 제작하는 것과 닮아있다고 생각해요. 도시 분위기도 좋고요. 악기 역시 빨리 만들어낼 수 없고, 천천히 만들어야 하는 점이 닮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해가 주는 분위기도 좋았지만, 그가 이곳에 더 애정을 쏟는 이유는 그 속에 자신의 꿈과 로망을 하나 가득 담아서다. 은은한 클래식 선율이 흘러나오고, 깔끔하게 정리된 작업 공간과 개인 연습공간을 자랑하는 조문제 스트링은 그가 졸업한 이태리 제작 학교와 비슷한 분위기로 꾸며놓았다고 한다. 그는 현재 이곳에서 직접 제작한 악기를 판매하고 수리도 하지만 그와 더불어 후학양성에도 힘쓰고 있었다. “유학 가려는 친구들에게 악기 제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후배들의 진로를 책임질 수는 없지만, 그 친구들의 길잡이 역할은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크레모나 국립 현악기 제작학교 졸업생 1세대인 그는 누구보다 악기 제작을 해보겠다 마음먹었을 때 느끼는 막막함을 알기에 후배들을 돌보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더불어 악기 제작을 취미로 배울 수 있는 과정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조문제스트링’. 이곳에서 그가 앞으로 또 어떤 도전을 해나갈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