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는 정말 소름 돋는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그는 매번 전시의 마지막에 다짐과 목표가 섞인 말을 전한다.
화업 인생 50년이 가까웠지만,
그는 여전히 원로보다 현역의 삶을 추구한다.
화가로써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는 단 한 점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매일 아침 8시 30분, 그의 작업실 문은 활짝 열린다.
과거에는 부산에서 유명한 음악다방 DJ로 활동하셨습니다
LP판을 내려놓고 붓을 들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부산 서면의 ‘대한다방’에서 활동할 때, 제 시간마다 찾아오는 팬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운영하는 미술학원으로 초대를 하는 겁니다. 따라갔더니 거울을 자기 앞에 갖다 놓고 자화상을 그리는데, 저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것처럼 그림만 그리는 겁니다. 처음에는 불쾌했지만, ‘그림을 그리면 그 세계에 빠져 초월할 수 있겠구나’라는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뜸 저한테 목탄을 내밀기에 데생을 해봤습니다. 미술을 배운 사람이 아니니까 마음대로 그렸는데, 재밌었습니다. 그렇게 DJ 일을 마치고 나서 매일 미술학원으로 갔습니다. 목탄을 쥐는 법, 석고 데생 등 미술의 기초적인 교육을 시켜주셔서 그때부터 정식으로 그림을 그리게 됐습니다.
군 복무 시절, ‘총 대신 붓을 든 군인’이셨습니다
39사단 창원 훈련소에 들어갔더니, 감사가 있어서 미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그림 그리던 사람을 차출해갔습니다. 그렇게 당시 선임이었던 ‘지석철’이라는 친구를 만나게 됐습니다.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 교순데, 오늘날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친구입니다. 함께 반공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면서 34개월의 군 생활을 보내게 됐습니다.
‘다른 작가가 그리지 않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해 대동면 낙동강 둑을 태운 적도 있으십니다
군대를 전역하고 입시 미술학원을 운영했습니다.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하는데 모두들 인물화, 정물화와 같은 그림만 그리는 겁니다. 리얼리즘을 해도 틀에 박힌 그림 말고, 색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운영하던 입시 미술학원의 학생들 30여 명을 데리고 대동면 낙동강에 갔습니다. 불을 지르고 정말 많은 사진을 찍었고, 동네사람들도 많이 놀랐습니다. 그 작품을 부산미술대전에 출품했는데 <계간 미술>에 실렸습니다.
1996년 첫 개인전 후 국내에서 17차례 개인전과
해외에서도 수차례 개인전을 펼치셨는데, ‘자연’이라는 주제는 일관됩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기 위해서 1989년에 김해로 이사를 왔습니다. 농사해 본 적도 없이 시골로 왔으니 매일 같이 낚시만 했습니다. 어느 봄날에 아무생각 없이 이름 모를 풀을 짓밟았는데, 그 위로 꽃이 올라오는 걸 봤습니다. 그 모습에 자연이 정말 대단하다는 걸 느끼면서 지금까지 그려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자연 훼손이 심각해지면서,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그려내는 일이 거짓 그림을 그리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아파트가 많아지는 등의 생활상이 변하면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그림 성향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으로 분청사기, 백자 등의 도자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
매일 200자 원고를 20매씩 쓴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작업에는 어떤 원칙이 있습니까?
매일 아침 8시 30분에 작업실 문을 열고 온종일 그림을 그립니다. 비 오는 날에는 색깔이 다르고 캔버스의 질감도 처지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자연에서 나오는 색은 불빛으로 조절할 수 없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색이 보이는 때가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입니다. 오후 4시 정도 되면 색이 또 달라집니다. 물감이 마르는 시간부터 다릅니다. 그림 도구를 따지기보다 계절과 환경을 활용하며 작업을 합니다.
김해원로예술인으로서 김해문화재단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김해에 좋은 작품 만드는 젊은 작가들 정말 많습니다. 김해시민이 김해작가와 작품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진입장벽을 낮춰줘야 합니다. 김해에 있는 작가들이 언제든지 전시 활동을 할 수 있게끔 공간과 기회를 만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