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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원로예술가 곡산 이동신의 ‘서각 이야기’
나무에 삶을 새겨넣는 예술가

곡산서각공예연구소를 찾았다. 서각가 이동신의 작업실은 입구에서부터 흡사 목공소를 연상케 했다. 한가득 쌓여있는 나뭇더미와 톱밥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주저 없이 작업을 중단하고 커피 한 잔과 직접 5시간 동안 구워낸 맥반석 계란을 선뜻 내어주었다. 자신의 취미 활동은 서각이고, 본래 직업은 노는 것이라 말하는 정리 권혁제 작가 그와 한 책상에 마주 앉았다.

서각, 끓지 않고 넘쳐서는 안 된다

서각을 하려면 활자와 그림, 나무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필요하다. 이렇듯 쉽지 않은 ‘서각’을 시작하려는 이들을 위해 서각가 이동신은 ‘기초’와 ‘마음가짐’을 강조했다. “배우는 과정에서 기초를 닦는 데 가장 열중해야 합니다. 나무의 질과 결을 모르면 서각을 하기 힘들죠. 기초를 다지는 일이 오랜 시간이 걸리고 힘들지만, 나중에는 더 쉽고 좋은 작품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배우다 보면 금방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에 그 마음을 누를 필요가 있습니다. 기초가 갖춰지고 나면 그 뒤에 글을 새기는 것입니다. 끓지도 않고 넘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채소 장수 이동신과 서각의 만남

그는 ‘서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그 행동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서 10년간 나무에 면도칼로 작품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서각’을 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1978년도에 채소 장사를 하면서 간판이 필요해 간판 가게에 의뢰했더니 5만 원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비싸서 나무 2개를 5천 원에 사서 직접 면도칼로 깎고, 1973년에 배워둔 서예 글씨로 글을 썼죠.” 우연히 간판을 만들다가 사자성어, 좋은 문구 등을 작업하며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서각가 이동신은 조카를 찾아갔다가 스승 ‘환옹 김진희’선생과 연을 맺게 됐다. “부산에서 서당을 운영하는 조카를 찾아갔는데, 서각 작품이 벽에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만든 작가에게 배워야겠다고 생각해서 찾아뵌 분이 환옹 김진희 선생님이었죠.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10년 동안 손에 물집 잡혀가면서 면도칼로 작업을 했는데, 연장과 공구를 사용하니 서각이 굉장히 쉽더라고요. 그래서 7년을 넘게 김해와 부산을 오가며 배웠습니다. 세심한 부분을 가르쳐 주시기보다 스스로 터득하게끔 하셨죠.”

작업실, 그 안을 들여다보다

그의 작업실 안에는 온통 작품으로 가득했다. 시계, 목제 전등과 같은 공예품도 서각 작품 못지않게 많았다. 이중 가장 아끼는 작품에 관해 물었다. “하나를 꼽을 수가 없죠.”라며 작업실은 물론, 작품을 보관한 개별 창고까지 보여주며 행동으로 대답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직접 제자들에게 지어준 호를 도장으로 만든 것이었다. 애정과 관심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을 눈으로 본 탓일까, 많은 제자가 그를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편하게 해주니까 그렇겠죠. 제 눈높이 보다는 제자의 눈높이로 맞춰 주려고 합니다. 항상 저는 이 자리에 머무르고 있으니까 언제든 찾아올 수도 있죠.”

아직 이루지 못한 이야기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활동을 뒤로하고,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겨둔 일이 있다고 한다. “김해 공원 곳곳에 정자가 많습니다. 모든 정자마다 그 이름의 각을 새겨서 달아주고 싶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더라고요. 각 동네를 전부 돌아다니며 정자의 이름을 파악할 수도 없는 실정이라 지금은 포기했습니다. 예산을 바라고 하는 일도 아닌데,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죠.” 김해에 대한애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개인적인 아쉬움뿐만 아니라 김해원로예술인으로서 김해예술의 맥을 잇는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말도 아끼지 않았다. “김해문화재단에서 김해 예술인들을 위한 다양한 전시 활동의 기회와 여건을 마련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전시장도 많아지고 지원도 다양해졌으면 좋겠고요. 김해문화 재단에서 하고자 하는 활동들을 원활하게 진행해서 활발한 예술 진흥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권혁제 작가 작성일. 2019. 0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