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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의 꿈을 빚는 도자 장인 임영택
김해의 도예가 임영택을 아십니까

도자기의 고장 김해에는 수많은 도예가가 활동하고 있다. 그중 진례면 김해분청도자박물관 앞 도예 공방 ‘태경도예’의 임영택을 만났다. 김해의 임영택은 지난해 ‘2019 대한민국공예품대전’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도예가다. 수상작 <아름다운 가야 찻자리>는 세월감이 묻어 있는 가야 토기 위에 백색 유약과 전통 문양의 조화로 만들어졌으며 실용성 또한 갖추어 디자인과 상품성이 높이 평가되었다. 부산·경남 지역 도예가가 대통령상을 거머쥔 소식은 이번이 두 번째다. 김해의 대표 도예가라 칭하기에 과언이 아니다. 물레를 벗 삼기를 30년, 임영택에게 도자기란 무엇일까

소년, 도자기를 만나다
임영택 도예가는 1969년 부산 송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0대 시절의 소년 임영택은 특별한 계기 없이 성적에 맞춰 한국조형예술고등학교(구 부산공예고) 도자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웬걸, 도자기는 단 몇 개월만에 소년을 사로잡았다. “고등학교에 진학은 해야 하고. 어떻게 보면 얼떨결에 들어간 도자과였는데 하다 보니까 정말 재밌더라고요. 저는 도자기에 대해 아예 무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게 맞는 건지, 잘하는 건지에 대한 감도 둔했어요. 손이 이끄는대로 도자기를 만들었죠. 선배들 눈엔 그런 제 작품이 신선했나 봐요. 제 작품과 저를 번갈아 보더니 교내의 도자 서클 가입을 권하셨어요.”

주뼛하며 들어선 도자 서클은 기능경기대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1·2학년 때는 연습하여 실력을 키우고 3학년 때 학교 대표 자격으로 대회에 참가하는 게 순서였다. 당시 부산에서 도자과가 설립된 고등학교는 한국조형예술고등학교가 유일했기에 교내 대표는 곧 부산 대표이기도 했다. 임영택 도예가는 서클 활동을 병행하며 1학년 때부터 도자 공부를 열심히 했다. 새벽 4시 30분 첫차를 타고 등교해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자정이었다. 그렇게 4시간 정도 쪽잠을 자며 3년간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재학 기간 3년 동안 단 한 번도 지각하는 법이 없었다. “실은 도자과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도 출석률 덕이 컸을 거예요. 제가 중학교 때 개근상을 받았었거든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몰랐던 소년의 숨겨진 무기는 성실함이었다. 게다가 뜻밖의 재미가 되어 준 도자를 만났으니 그에게 고교 시절은 힘들기도 했지만 참 행복했다. 여러 의미로 그에게 도자기는 재능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도자기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도예가의 첫 번째 요건, 인내
학교에서 1, 2위를 다투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던 임영택이지만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우수 성적을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느꼈어요. 항상 최선을 다했지만 타 지역에서는,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둘러보지 않았어요. 세상은 넓고 저보다 수준 높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제 도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경험이었죠.”

3년의 치열한 배움 끝에 임영택 도예가는 대학 진학 대신 학교 선배의 도자 공방 ‘세얼도예’에서 물레대장(도자기 기술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학업보다 빨리 취업을 해서 자신의 요장을 갖고 싶었다. 세얼도예에서 군대 가기 전 1년, 전역 후 1년 해서 도합 2년을 배웠다. 시간이 흐른 뒤 공병대를 제대, 1992년 마침내 그는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에 자신의 공방을 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IMF 외환 위기로 생계가 휘청이게 되면서 도자기 일을 잠시 접어야 했다. 공병대 시절의 경험을 살려 종합 설비 회사에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2001년 지금의 요장이 있는 김해 진례로 오게 되었다. IMF 외환 위기로 빚이 있었기에 공방을 차릴 여건은 되지 못했다. 그때부터 다시 프리랜서의 신분으로 남의 공방에서 일했다.

임영택은 포기하지 않았다. 학교 졸업 때부터 꿈꿔온 ‘나의 요장’을 차리는 것은 임영택의 가슴 속에 늘상 자리하고 있었다. 빚 문제가 점점 해결되면서 임영택은 2008년부터 다시 자신의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때의 초심도 함께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20년 만에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재도전하기로 했다. 그는 팸플릿 내 수상 내역이 2010년부터 시작되는 것을 손으로 가리키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도자기에 대한 미련이라고 해야 할까요. 생활이 해결되어가니 2008년경부터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어요. 비록 20년이 흘렀지만 소년 임영택으로 돌아간 것 같았죠. 2010년 경남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성과를 얻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어요. 계속 도전하다 보니 2012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했어요. 긴 공백 기간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20년 만의 희소식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울컥해요.”

사람 냄새가 나는 도예가
임영택 도예가는 2010년 김해 진례면에 현 도자 공방 태경도예를 열었다. 위기를 이겨 내고, 못 다한 꿈을 이루고, 요장을 차렸다. 2012년 수상 이후 그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공예품대전이다. 임영택의 수상 내역은 2010년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빽빽하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수상 경력이기보다 대한민국공예품대전을 향한 과정이었다 말한다. 그리고 지난해 임영택 도예가의 작품이 대한민국공예품대전 최고상인 대통령상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대통령상을 받은 작가의 삶, 심경 그리고 목표는 무엇일까. “이제 검증받는 일은 잠시 내려놓으려고 해요. 생각해 보면 전 평생을 ‘도전’을 목표로 해왔어요. 그 과정을 도자기와 함께해서 재밌었고 성장했지만 이젠 도자기로 대중들과 소통하고 싶어요. 사실 저는 물레에서 보내는 시간이 작품의 영감이 될 만큼 물레를 사랑하거든요. 물레에서 자유로울 때 가장 행복해요. 제가 하고 싶은 도자기, 그런 제 작품을 찾아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요.”

임영택 도예가에게 도자기는 운명이 아니었을까. 학창 시절 도자기를 처음 접한 때부터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도 도자기의 품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임영택은 운명을 일찍이 알아채고 부단히 노력한 걸지도 모르겠다. 임영택 도예가가 대통령상을 차지하면서 얻게 된 것은 단순히 ‘대통령상 수상자’라는 수식어가 아니다. 지금도 도자기를 연구하며 그가 걸어온 길을 꿈꾸는 이들에게 팔 걷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여유가 조금 더 생긴 것이다. 도자기와 함께한 3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고된 순간도 있었지만 도자기를 생각하면 인간 임영택은 외로운 때가 없었다. 아니, 참 찬란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글·사진 이채린 에디터 작성일. 2020. 0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