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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자의 소리 인생을 말하다
우리 소리를 따라 걸어온 삶 - 김해의 소리꾼 홍승자

판소리는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라는 뜻의 ‘판’과 노래를 뜻하는 ‘소리’가 합쳐진 말이다. 판소리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음악적으로 표현한다. 장단에 맞춰 노래하면서 상황을 전개해 나가는 ‘소리(창)’, 이야기하듯 내용을 전개해 나가는 ‘아니리’, 부채와 다양한 몸짓을 사용하고 표정을 통해 극적인 상황을 그려내는 ‘발림(너름새)’으로 구성된다. 여기에 고수의 장단이 어우러지고, 청중들의 감동이 묻어나는 추임새까지 나와야 판소리 공연이 완성된다. ‘얼씨구’, ‘잘한다’, ‘그렇지’ 등의 추임새로 그 맛이 더해진다. 북을 치는 고수와 소리꾼, 단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공연. 판소리 완창 공연은 장단과 소리만으로 약 5시간 동안 이어진다. 우리나라 국가 무형 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는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세계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돼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김해의 소리꾼 홍승자는 무형문화재 제14호 강산제 심청가 이수자다. 가야가락예술단 단장과 경남민예총 김해지 부장을 맡아 우리 민족 고유의 예술을 전승 공연하며, 홍승자판소리연구소를 열어 판소리를 가르치고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국악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과 인기는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 소리꾼들에게는 공연만큼이나 가르치는 일이 중요해졌다. 소리꾼 홍승자에게도 우리 소리를 가르치는 시간이 가장 기쁜 일이다.

홍승자는 1964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강진에서 자랐다. 요즘은 대중이 즐기는 오락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러나 TV가 보급되기 전 그리고 대중문화가 발전하기 전에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던 것은 악극단 공연이었다. 홍승자는 열 살 무렵, 악극단에서 처음 소리를 만났다. “그 당시에 여러 고장을 다니면서 창극도 하고, 약도 팔던 악극단이 있었어요. ‘나일롱 극장’이라고 불렸어요. 전남 지역을 돌면서 공연을 하던 악극단이 강진에도 왔는데, 올 때마다 옆집에서 석 달씩 머물렀지요.”

악극단은 아침마다 공연을 알리는 풍악을 울렸다. 그럴 때면 어린 소녀 홍승자의 마음도 덩달아 설레었다. “소리가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끌렸어요. 악극단은 오전에 한 차례, 늦은 오후부터 저녁까지 또 한 차례 공연을 했어요. 그런데 애들은 극장에 못 들어갔어요. 밖에서 공연 소리만 듣고 있으면 실제로 보고 싶어서 애가 탔지요. 저 안에는 얼마나 재미있는 일들이 있을까 궁금하고,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어린 제 마음에 들어왔어요. 아쟁, 징, 악극단 배우들의 소리를 들으면 왠지 눈물이 났어요.”

극장에 못 들어간 소녀 홍승자는 배우들이 묵고 있던 옆집 근처를 맴돌았다. 공연 연습 소리라도 들려오면 까치발을 하고 담 넘어 배우들을 보았다. “여배우 중에는 간혹 갓난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이들이 있었어요. 저는 공연이 시작되면 그 아기들을 데리고 놀았어요. 그게 고마웠던지 아기 엄마인 여배우들이 단가를 한 대목씩 가르쳐 주기도 했죠. 그러다가 어느새 애보기가 됐고, 자연스럽게 극장을 무시로 드나드는 특권도 얻었죠.” 어머니는 극장을 드나드는 어린 딸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악극단이 강진에 올 때면 여러번 야단법석이 나기도 했다. “어머니는 남의 딸 꼬셔내 광대를 만들 작정이냐며 여배우들을 혼냈고, 저도 혼났죠. 어머니한테 머리끄덩이도 여러 번 잡혔답니다.” 그 시절의 이야기는 시대극 드라마의 한 대목처럼 재미있다.

악극단 여배우들의 아기를 봐주던 홍승자는 그냥 소리가 좋았다. 소리꾼이 되겠다는 결심이나 우리 소리를 지켜가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천천히, 자연스럽게 소리꾼의 길을 걸어갔다. 마치 앞에 펼쳐진 길이 소릿길 하나뿐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홍승자는 처음에 동편제(東便制) 소리를 배웠다. 동편제는 송흥록이 발전시키고 송만갑이 완성한 판소리의 유파로 전남 북동부 지역에서 성행했다. 그가 강산제 소리꾼이 된 것은 국악인 이임례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강산제는 박유전이 창시한 판소리의 유파로 체계가 정연하면서도 범위가 넓다. 이임례는 강산제 심청가의 기능보유자로, 영화 <휘모리>의 실제 주인공이다.

1990년대 초에는 창원 시민들을 위해 국악 공연을 열었다. 이 무대에서 홍승자는 남도 소리를, 이임례는 초청 국악인으로 판소리 공연을 했다. “이임례 선생님 소리가 제 마음에 고스란히 들어오는 것 같았어요. 다른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안 보이고 그 소리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았지요. 말 그대로 운명처럼 끌렸습니다. 선생님의 넓고 깊은 인품에도 끌렸습니다. 바로 광주에 살고 계신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때부터 광주를 오가며 선생님께 소리를 배웠어요. 오직 소리만 생각했지요. 그렇게 2005년에 강산제 심청가의 이수자가 됐습니다.”

현재, 홍승자는 1996년부터 김해로 와 살면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말씨, 환경, 지역의 풍속이 다르면 좋아하는 국악의 분야도 다릅니다. 경상도는 재미있고 경쾌한 걸 좋아해요. 사물놀이와 춤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경상도에서 소리를 가르치기가 쉽지는 않아요. 전라도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소리는 한이 바탕이 되지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말 못 할 응어리나 한이 있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마음 아프고 서러울 때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소리였습니다. 그러니 소리꾼이 된 것은 운명이었다고 생각해요. 운명적으로 끌렸을 뿐입니다. 소리꾼을 꿈꾸고 달려온 것은 아니지만, 살다 보니소리꾼이 됐고 소리 선생이 된 거지요.”

홍승자는 김해 지역 초·중·고등학교와 여러 문화센터, 경남과 부산에서도 소리를 가르쳐왔다. 부산 사하구 괴정동의 평생학습문화센터인 ‘소리너름’에서 소리를 가르치는 그를 따라 가보았다. 소리가 좋다는 사하초등학교 2학년 김시안 양이 허리를 반듯이 하고 앉았다. 맑고 낭랑한 목소리로 단가를 노래하는 어린 소녀를 보니, 홍승자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화려한 볼거리가 많은 세상에도 우리 소리에 자연스럽게 끌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소리는 이 땅에 사는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돼있는 문화 유전자다.

글 박현주 북칼럼니스트 작성일. 2020. 0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