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은 자연의 생명과 에너지를 품고 있다. 흙과 물을 품고 만들어져 불로 단단하게 구워진 도자기는 자연의 다른 모습이다. 여기에 장인의 섬세한 손길이 닿으면 자연을 담은 반죽은 형태를 가진다. 가마 안에서 불이 일으키는 변화는 ‘신의 손길’이다. 자연의 조화, 인류의 지혜와 재능, 장인의 간절한 마음이 불러오는 신의 손길은 흙이 도자기로 변태하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과정이다. 도자기는 인류의 생존에 꼭 필요한 기물이었다. 흙으로 그릇을 만들면서 곡식 알곡이 흩어지지 않도록 보관이 가능해졌고, 형태가 없는 물을 담을 수 있었으며, 음식을 조리할 수 있었다. 인류가 새로운 차원의 식생활을 시작해 현재의 식문화로 발전하기까지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해온 도구가 바로 도자기 그릇이다. 인류는 도자기와 함께 살아왔다. 박용수 도예가는 도자기를 ‘생명’이라고 말한다.
도자기는 생명, 경외의 대상
박용수 도예가의 작업장 ‘김해도예’는 진례면 고모로 442번길 36-11에 있다. 그의 작업장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가마가 보인다. 가마 옆에 도자기를 빚는 공방과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소박한 전시 공간이 있다. 겨울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는 마당을 지나면 살림채가 있다.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회화와 조소 등 현대미술을 접목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도자기는 생명입니다.” 앞에 놓인 찻잔을 들며 박용수 도예가가 말했다. “흙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과 유기물질을 품고 있습니다. 작은 씨앗 하나를 큰 나무로 키워내지요. 불은 활활 타오르다가 꺼지면 소멸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을 사용해 도자기를 만드는 동안 애착이 생겼습니다. 불이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생각에 경외감을 가지게 됐지요. 물은 그야말로 생명의 근원이지요. 도자기를 빚는 도예가는 거기에 혼을 불어넣는 사람입니다. 영혼을 담아낸다고나 할까요. 좋아하는 그릇을 오래 사용해 본 적이 있나요? 그 그릇이 깨어지면 그만인 사물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도자기는 생명이고, 어떤 면에서 도자기를 빚는 사람은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 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대하는 마음으로 도자기를 빚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찻잔을 가만히 만져본다. 찻잔을 만든 흙은 어디에서 얼마큼의 시간을 보내다가 왔을까를 생각해 보니 신비롭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도자와의 인연
박용수 도예가의 작품을 보면 현대미술의 향취가 느껴진다. 그가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는 1959년 부산 남구 대연동 못골에서 나고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중학교 때는 미술반 활동을 했다. “개성이 강한 이중섭과 고흐, 고갱 같은 훌륭한 화가들의 그림이 좋았습니다. ‘나는 저렇게 그릴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저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죠.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부산공예학교를 선택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예술고가 생기기 전이었어요. ‘공예’라는 개념을 정확히 모르면서 그저 저 학교에 가면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고 하고 생각했던 겁니다.” 입학한 뒤에야, 공예학교의 수업 과정이 그림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공예학교에 진학한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들끼리 일요일마다 떠나는 스케치 여행은 학창 시절의 빛나는 추억이었다. 2학년 때 그는 또 한 번 진로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조소, 석공, 도자, 염색, 금속, 표구, 목칠 등으로 세분된 전공 과정을 선택해야 했다. “회화적요소가 많은 도자공예를 선택했습니다. 도자공예를 하면 제가 좋아하는 그림과 색을 접목하는 작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박용수 도예가는 그렇게 도자기를 만났다.
김해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도예가의 삶
경기도 수원에 있는 (주)유니버스세라믹 개발실, 경주의 월성요업(주) 개발실에서 근무하다가 첫 공방을 연 곳은 부산 기장군 정관면이었다. 이후에 공방을 옮길 장소를 찾기 위해 부산과 경남 일대를 찾아다니던 중, 김해 진례면에서 도자기 작업 중인 공예학교 선배의 공방에 들른 것이 2001년이었다. 그 선배는 ‘미교다물요’를 운영하는 도예가 정민호 씨다. “선배님도 뵙고 고민도 함께 나누려고 들렀는데, 현재의 이곳을 소개해주셨어요.” 김해에 가마를 지으면서 그는 분청 작업을 주로 하게 됐다. “백자가 좀 차가운 느낌이 있다면, 분청은 부드럽고 정감이 넘치고 인간적인 느낌이 들지요. 문양을 원하는 형태로 작업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이고요. 예부터 경상도쪽의 도자기는 투박하고 소박한 특징이 있습니다. 도예가들도 그것을 찾아 내는 작업을 하고 있고요.”
분청의 본고장, 김해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비옥한 퇴적토가 있는 김해는 예로부터 좋은 흙과 가마에 불을 땔 나무가 많은 땅이었다. 그 자연조건이 김해를 분청의 본고장으로 만들었다. 분청도자기는 청자, 백자와는 달리 서민의 삶 속에서 함께 했기에 형태와 문양이 자유로웠다. 분청도자기 장인의 손길은 가식이 없고, 순수하고, 담박했다. 그래서 생활자기, 민족자기라고도 부른다. 자유분방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표현을 담은 분청사기는 한국적인 미의 원형으로 불리며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또한 오늘날 분청사기는 전통을 지켜가면서 현대인의 감각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도예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 박용수 도예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색을 넣어, 회화적인 요소를 접목한 분청 도자 작업을 하고 있다. “작품을 빚어낼 때만큼은 제가 조물주가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림을 접목해서 도자기를 만드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완성된 것이 아니라 현재도 노력하고 연구합니다. 색과 문양이 튀지 않고, 추상적이면서도 잘 어울리는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박용수 도예가가 빚어내는 도자기는 앞으로 어떤 변화를 보일까. 도자기에 대한 그의 사랑은 깊고 넓었다.
(주)미화당 사보편집자, 동보서적 <책소식> 편집장으로 일했다. 현재 북칼럼니스트로 <국제신문>에서 작가를 만나 소개하는 칼럼을 쓰고, 라디오를 통해 책을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작성일. 2019. 1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