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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 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의미와 과제
지역과 국가를 넘어 인류 공통의 자산이 된 대성동 고분군
글.송원영 김해대성동고분박물관장 사진.김해대성동고분박물관

고구려, 백제, 신라와 더불어 한반도 남부지역에 500년간 존속했던 가야의 지배자 무덤들인 ‘가야고분군’ 7개소가 국내 16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최종 등재되었다. 지난 9월 25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개최된 제46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결정된 사항이다.

지난 2011년부터 진행한 등재 추진 사업은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함안 말이산고분군,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각각 잠정목록 등재(2013년), 3개 고분군 통합 잠정목록 등재(2015년), 최종 7개 고분군으로 확대하여 등재(2019년), 최종 후보 선정(2021년)을 거쳐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세계유물 및 유적지 협의회(ICOMOS)의 현지실사와 심사를 거쳤다. 원래 2022년 러시아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었으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1년간 순연한 끝에 등재된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사적 제341호) 등 7개소로 구성된 연속유산인 가야고분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기준 ⅲ(현존하거나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유일한 또는 적어도 독보적 증거)을 적용하였다.

이로써 한국 고대사 속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더불어 동 시기의 가야문화가 모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쾌거를 거두었다. 다른 유산들에 비해 늦었지만 가야고분군은 가야 연맹의 독특한 정체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보존 상태 또한 전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관리되는 만큼 양호하다. 무덤 양식과 출토 유물 또한 다른 삼국의 고분군과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므로 이들과 마찬가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가야는 기원후 1세기부터 6세기까지 약 500년간 신라, 백제와 더불어 한반도 남부에서 고대 문명을 이루었던 왕국들의 명칭이다. 같은 시기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신라, 백제가 경주와 서울이라는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권을 확장해 나간 것에 비해 가야는 해안과 강을 중심으로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때로는 독자적으로, 때로는 연합하여 세력을 구축했다는 점이 다르다. 이 점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비슷하다.

가야 전기를 대표하는 금관가야와 후기를 대표하는 대가야가 각각의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으나, 건국시조를 형제로 묘사한 점은 공통된다. 이처럼 가야 각국은 내부에서 보면 다른 왕국이지만 외부에서 볼 땐 동일한 문화를 가진 공동체로 인식되고 있다.

사라진 가야 문명을 대표하는 것은 무덤 유적인 고분군이다. 가야 유적 중에서 인적이 드문 높은 구릉과 산에 위치하고, 유교의 영향으로 조상의 무덤을 훼손하지 않는 풍습에 따라 다른 유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고분군이 가야 문명을 입증하는 최적의 자료가 되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은 가야문화의 발상지이자 전기 가야의 맹주국이었던 금관가야의 중심지에 위치한다. 가야고분군중 가장 이른 시기인 3세기 후반에 고분군이 조성되기 시작해 5세기 후반까지 연속되는데, 중심 연대는 4세기와 5세기 전반이다.

가야고분군에 나타난 가야문화의 특징을 보면 우선 가야인들은 내세를 믿어 각지의 신분에 맞게 그들이 살던 집과 비슷한 규모의 무덤을 만들고 저승에서 쓸 많은 유물들을 함께 부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그들을 모실 신하와 시녀 등을 순장하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신라와 백제가 불교의 수용으로 일찍 순장을 금지한데 비해 가야는 멸망시까지 순장 제도를 지속하였으며, 그 숫자 또한 신라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규모였다. 3세기 말 대성동고분군에서 시작된 순장 문화는 5세기 중엽 이후 지산동고분군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7개소의 가야고분군이 가진 또 다른 공통점은 해안가나 강가의 조망이 탁월한 구릉이나 산 능선을 이용하여 묘지를 조성한 점이다. 이는 평지에 무덤을 축조한 신라와 뚜렷하게 대비된다.

가야는 한국 고대사에서도 소외된 존재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심의 역사 서술은 당시 삼국과 더불어 500년간이나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를 역사에서 지우는 역할을 했다. 가야는 많은 물적, 인적 자원을 통해 고대 일본의 국가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중국과도 활발한 교역을 했다는 역사적 증거가 가야고분군에 물증으로 남아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우리의 기록보다 오히려 일본 측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가야에 대한 기록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은 가야문화가 고대 일본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방증한다.

가야는 과거 제국주의 시절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역사적 근거가 된 아픈 상처가 있다. 이후 가야고분군을 우리 손으로 활발하게 발굴하고 그 실체를 구명한 결과 일본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증거를 확보하였으며, 오히려 가야문화가 일본 고대 문화의 원류였음이 밝혀졌다. 일제의 식민사관인 소위 ‘임나일본부’를 증명할 어떤 물증도 가야 지역에서 발굴된 적이 없는 반면 가야 철기는 고대 일본의 지배자 무덤인 ‘전방후원분’에서 다량으로 출토되며, 가야 토기 제작 기술은 일본 고분 시대 토기인 ‘스에키’의 원류가 되었다.

가야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는 단순히 이를 통해 관광객을 많이 유치하고 경제 파급효과를 전망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관광객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제대로 관리, 보존하고 연구 및 전승한다면 당연히 따라올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진정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남긴 이 소중한 유산을 지역과 국가를 넘어 인류 공통의 자산으로 그 가치를 공인받은 만큼 더욱 철저하게 보존하겠다는 의지를 전 세계 인류 앞에 다짐하고 약속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역사이지만 인류 보편사로 다시 태어난 가야사의 진정한 연구 복원이 필요하다. 가야고분군을 한국만의 유산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세계인에게 널리 알리고 그 가치를 제대로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과거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왜곡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 것이다. 등재에 그치지 말고 후속 사업 추진이 더 중요할 것이다. 불과 19년 뒤 가야 건국 2000주년이 되는 2042년엔 그야말로 세계인의 축제가 펼쳐져야 할 것이다.

작성일. 2023.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