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김해문화관광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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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공간, 생명의 자연, 사라지는 대지 <멕시코 판화>展
회화를 감상하듯 한 점 한 점 들여다볼 수 있는 매력이 있는 흔치 않은 전시

십 년도 더 된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정원식 판화가의 전시를 열기 위해 멕시코 할리스코 주에 간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멕시코에 있는 미술대학에는 판화 전공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그게 신기해서 정원식 작가와 나는 몇몇 대학을 방문해 판화 기법을 서로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런 기억 때문인지 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에서 <멕시코 판화>展이 열린다는 정보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특히 현재 멕시코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7명의 작가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이니 더더욱 기대가 컸다. 미국의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서양미술의 도도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들만의 시각성을 유지하고 있는 멕시코 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실제로 20세기 초 멕시코 벽화 운동은 ‘독립’과 ‘혁명’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자신들만의 형식을 개발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 벽화 운동이 멕시코 시각 예술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판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기대했던 대로 전시실에서 만난 판화들은 평소 한국에서는 접하기 힘든 스타일의 작품들이었다. 형식적인 부분도 흥미진진했지만 멕시코의 역사를 반영한 그림의 내용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공간, 대지, 자연>이라는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자연으로서의 대지와 도시문명으로서의 공간이 뒤섞이면서 발생하는 멕시코 사회의 부조리가 전시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중 기억에 남는 몇몇 작가와 그 작업을 살펴본다.

프란시스코 로메로 라모스(Francisco Romero Ramos)
로메로는 자연과 도시 그리고 역사를 모두 뒤섞어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수많은 거미줄이 뒤엉킨 듯 중첩된 선, 기하학적 면과 불규칙적인 단면은 이 풍경을 추상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사실 이것은 구체적인 형상들이 뒤엉킨 결과이다. 그래서 이 풍경에서 우리는 산을 보기도 하고 도시의 빌딩을 보기도 하고 얼기설기 엮인 실을 보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노타우로스를 현대 인간 세계에 가두어 세속과 신화를 뒤섞어 버린다. 그의 말대로 “세속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간에 균형을 유지할 가능성”을 그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알란 알타미라노(Alan Altamirano)
알타미라노의 판화는 시각적으로 매우 명쾌하다. 세밀하게 중첩된 선과 살짝 번진 점들이 눈에 띄는 그의 작품에는 유독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그의 판화에서 여성은 생명을 잉태하는 인류의 대표로 여겨지기도 하고 태초의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보기에는 편한 그의 이미지들을 도상해석 학적으로 들여다보면 마야인의 역사, 인간의 삶과 죽음, 대지와 인간의 겹침등과 같은 진지한 개념과 만나게 되는데, 이는 꽤 흥미로운 지점이다.

아나 엘레나 말도나도 아레날(Ana Elena Maldonado Arenal)
일명 마레날(Maranal)로 불리는 이 작가는 30년 넘게 판화 작업을 한 베테랑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전시실을 둘러보았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이 마레날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였는데, 역시 오랜 시간 작업을 한 공력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폭격이라도 맞은 듯 부서진 종들과 돌 그리고 자동차 바퀴가 나뒹굴고 있는 폐허에서 아이를 지키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양 두 눈을 부릅뜬 엄마의 모습은 매우 강렬하다. 자연스럽게 생존의 처절함, 두려움, 외로움과 같은 감정이 올라온다.

이르마 레예스(Irma Reyes)
동생을 등에 업고 일하는 소녀의 모습을 그렸다. 작가는 이 소녀들이 멕시코 미초아칸 주 우루아판 농촌지역의 원주민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이 작품에 등장하는 소녀는 멕시코 농촌의 비참한 삶을 날 것으로 보여준다. 그렇다고 판화 속 이미지가 부정성에 대한 고발은 아니다. 망원렌즈로 당겨 포착한 듯 보이는 이 소녀들은 언제나 그랬듯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소녀의 척박한 삶이 더 깊이, 더 오래 각인되는 느낌이다.

에두아르도 로블레도 로메로(Eduardo Robledo Romero)
그의 작품은 대단히 상징적인데 멕시코 벽화를 축소해놓은 듯 수많은 도상들이 납작하게 뒤섞여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대지모(大地母)의 시간>이 대표적이다. 비명을 지르는 닭이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그 뱃속에는 시커먼 연기를 뿜어대는 공장이 보인다. 아래로는 선인장이 있는 땅과 옥수수가 보이고 수레를 끄는 당나귀가 있다. 양쪽 옆으로 나체의 남성과 여성이 식물과 한 몸이 되어 묘사되어 있다. 이 판화는 직관적으로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땅의 기운이 망가지고 결국 자연과 인간 모두 파멸의 길로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로메로의 작품이 보여주듯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직·간접적으로 대지와 자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멕시코 역시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대지와 자연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속에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너짐도 함께 있다.

사실 판화 전시는 그리 인기가 좋지 않다. 판화가 원본으로서의 회화를 복제한 결과물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이런 선입견은 실제로 판화가 회화의 복제로 기능했던 초기 역사에 기인한다. 지금의 판화는 판화 기법 자체를 연구해서 만들어진 독립적인 예술 영역이다. 심지어 회화처럼 한 점만 만드는 판화도 존재한다. 즉, 이번 <멕시코 판화>展에서 만나는 판화는 회화를 감상하듯 한 점 한 점 들여다볼 수 있는 매력이 있다. 한국 현대미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지’라는 화두를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작성일. 2019. 07.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