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스포츠 사이에서 태어난 ‘빙판 위의 발레’
러시아 문화 예술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제정 러시아의 수도이자 클래식 발레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 피겨스케이팅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상트페테르 부르크에서 아이스 발레가 태동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1998년 당시에는 생소한 장르였던 아이스 발레를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한 것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아이스발레단이었다. 이후 매년 한국을 찾은 이들은 공연마다 매진을 기록하며 아이스 발레를 여름 시즌의 스테디셀러로 등극시켰다. 흔히 빙상 경기장에서 개최되는 아이스 쇼와는 달리, 아이스 발레는 전막 발레를 위해 극장에서 상연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아이스 발레를 처음 접하는 관객들에게는 ‘발레’보다 ‘아이스’가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다. 얼음 무대의 차갑고 축축한 기운은 객석에서도 느껴질 정도다. 맨바닥 이었던 무대가 빙판으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하루. 방수천, 합판, 단열재, 합판, 방수천 총 5겹의 세트업 위에 냉각 코일이 깔리고, 분당 250ℓ의 부동액이 영하 15℃ 상태에서 주입된다. 냉각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4~5t 정도의 얼음 조각을 골고루 채우고 물을 뿌리면 5~10cm 두께의 빙판 무대가 완성된다. 표면 온도를 영하 15℃ 이하로 유지하기 위해 냉각기 가동은 필수다. 객석 온도도 20℃ 정도로 맞춰진다. 이로써 아이스 발레 공연장은 한여름에 완벽한 피서 공간이 되는 셈이다. 얼음 무대라는 특수성은 기존의 발레 공연과 다른 특징들을 보여준다. 대개 바퀴를 부착해 이동시키는 미니 세트나 소도구들은 스케이트 날로 대체된다. 모든 것이 스케이트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극 중 배경이 얼음 왕국처럼 느껴진다. 또 빛이 얼음에 반사되는 점을 고려해 조명의 운용 방식도 면밀하게 조정된다. 공연장의 낮은 온도와 높은 습도 때문에 연기자들이 춤을 출 때마다 ‘사각사각’ 얼음 긁히는 소리가 객석까지 전달된다. 이 점은 분명히 아이스 발레만의 묘미지만, 스케이트 날에 튀어 오른 얼음에 연기자들의 의상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그런데도 이들은 빙판에서 고도의 발레 안무를 수행하며 무대를 종횡한다. 스케이트를 신고도 정교한 동작을 노련하게 소화하는 이들은 ‘발레를 익힌 스케이터’와 ‘스케이팅을 배운 무용수’들이다. ‘아이스 발레’의 태생 자체가 예술과 스포츠의 혼종인 만큼, 연기자들도 발레와 스케이팅이라는 뿌리를 넘어 양쪽을 두루 익힌 베테랑일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시스템을 완성한 이들 역시 피겨스케이팅과 발레의 마스터들이다. 피겨 부문에서 ‘러시아 마스터 오브 스포츠’의 직위를 획득할 만큼 뛰어난 스케이터였던 카미노프 단장은 아이스 발레에 매력을 느껴 발레단 창립 멤버이자 수석 발레리노로 활약했다. 루돌프 누레예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와 함께 러시아 3대 발레리노로 꼽히는 콘스탄틴 라사딘 예술감독 겸 수석 안무가는 아이스 발레가 정통 발레의 품격을 훼손하지 않고 그 주제를 제대로 구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익숙한 레퍼토리로 즐기는 아이스 발레
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이스 발레단을 있게 한 운영진과 연기자들의 노력은 격조 높은 레퍼토리들을 통해 결실을 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 <호두까기 인형>, 그리고 프로코피예프의 <신데렐라> 등이다. 이번에 내한하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Sleeping Beauty)>는 189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한 명작 발레다. 국내에서는 국립 발레단이나 유니버설 발레단의 주요 레퍼토리로 이미 익숙한 작품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동화작가 샤를 페로의 동화집에 수록된 작품을 대본으로 한 전형적인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이다. 원제는 ‘잠자는 미녀’이지만 국내에서 종종 ‘공주’로 번역되는 것은 마녀의 저주로 긴 잠에 빠진 여인이 공주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처음 이 작품을 접하는 관객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이야기다. 아이스 발레가 아닌 클래식 발레로서 들여다봐도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러시아 황실 발레의 절정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차이콥스키의 다른 대표
작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러시아 발레 특유의 정교한 테크닉이 모든 동작에 묻어있고, 화려함과 웅장함을 두루 갖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세부 동작이나 안무 면에서 클래식 발레의 규칙을 가장 충실히 따르고 있는 작품으로 유명해 러시아 클래식 발레의 교과서로 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정통 발레와 더불어 이야기 전개와 별개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각 캐릭터의 춤 또한 인상적이다. 가령 ‘파랑새 2인무’, ‘늑대와 소녀’, ‘장화신은 고양이’, ‘라일락 요정의 춤’과 같은 동화 속 캐릭터들의 연결된 춤은 발레 초심자들에게도 흥미를 느끼게 할 만한 장면이다. 특히 오로라 공주의 독무인 ‘장미 아다지오’는 전설적인 발레리나 마고트 폰테인을 비롯해 다수의 스타를 탄생시킨 대목인 만큼 눈여겨볼 만하다. 물론 ‘아이스 발레’로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다양한 피겨스케이팅 기술을 즐길 수 있는 은반의 공연이다. 어쩌면 이 점이 가장 중요할 수 있다. 한때 전 세계를 호령했던 러시아의 전설적인 스케이터들과 발레 스타들이 안무하고 직접 보여주는 스케이팅 기술을 발레 작품에서 보는 것은 한여름밤의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아이스발레단의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오는 7월 30일과 31일 양일간 김해서부문화센터 하늬홀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무용미학과 비평을 전공하고 주간한국과 한국일보, 더뮤지컬을 거쳤다. 공연예술의 다양한 변화를 주시하며 대학에서 춤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작성일. 2019. 0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