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 레퍼토리에서 초연된 모린 왓킨스의 희곡 〈시카고〉의 자필 초안(출처: Yale Collection of American Literature, Beinecke Rare Book and Manuscript Library)
좋은 작품은 시대를 넘나든다. 대사 한 마디 가사 한 소절 바꾸지 않고도 시대에 맞는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명작들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황금기를 열었던 작품 〈오클라호마! Oklahoma!(1943 초연)〉의 경우 2019년에 대사와 가사를 그대로 두고 음악 편곡과 연출만 획기적으로 바꾼 리바이벌 버전이 올라와 전통적인 브로드웨이 팬들에게 깊은 충격을 선사했다. 작품 안에 내재해 있던 여성차별과 인종 차별은 물론 주인공의 성 정체성, 아름답게만 그려지던 공동체 의식의 어두운 면까지 낱낱이 의문을 던지면서 극단적으로 호불호가 갈렸다. 고전적인 팬들 입장에서는 특히나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원 작곡가 리차드 로저스의 주옥같은 음악이 컨츄리풍으로 다시 편곡된 것부터, 애정을 지녀왔던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주어진 상황도 밝은 면보다 어두운 면이 더 강조되었으니 큰 실망을 했겠지만, 이 작품을 공룡시대의 화석처럼 보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생명을 얻은 듯 재발견의 기쁨이 컸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뮤지컬 〈그리스〉 역시 재공연마다 새 생명을 얻으며 거듭 젊어진 케이스다.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시카고에서의 초연은 브로드웨이로 옮겨 오면서 순한 맛과 줄어든 러닝타임으로 거듭났지만 그 안에 담긴 데이트 폭행이나 여성의 성적 대상화 등이 필터 없이 그대로 담겼던 장면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를 맞았다. 물론 그러한 내용적인 변화보다 흥행을 고려한 영화에만 포함 된 노래나 장면을 무대 리바이벌에 포함하는 등의 노력이 선행되기는 했다. 뮤지컬 〈그리스〉는 브로드웨이 3번 공연과 영화, TV 라이브 공연이 모두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공연되었다.
뮤지컬 〈시카고〉의 초연은 1975년 6월이었다. 평론가들의 평은 야박했다. 뉴욕타임즈의 전설적인 비평가인 브룩스 앳킨슨은 인상적인 곡도 없으며 넝마 같은 의상과 해롤드 프린스가 연출했던 〈캬바레〉의 영광에 기댄 아류작이라는 독설을 날렸다. 〈캬바레〉와 똑같은 창작진인 작곡가 존 칸더와 작사, 대본작가 프레드 앱에, 캬바레의 안무를 맡았고 영화까지 감독해 오스카상을 거머쥐었던 밥 파시가 연출하고 안무했지만 한 바퀴 돌아 결국 해럴드 프린스의 그늘이냐는 비아냥마저 들어야 했다. 〈캬바레〉가 1933년의 인종차별이 극단적으로 치닫던 베를린을 배경으로 1960년대 미국과 유럽의 민권운동의 현주소를 돌아보는 시대정신을 담아서 평단의 극찬을 받은데 비해, 1920년대 초반의 금주시대를 배경으로 두 여성이 살인을 저지르고도 무죄방면된 사연 어디에서 시대정신을 찾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도 뒤따랐다. 그저 자극적인 소재만을 내세워 관객을 혹하려는 작품이라는 평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돌아보면 시대를 앞서간 작품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비평가들 자신이었다.
1996년, 뉴욕의 시티센터에서 매년 열리기 시작한 ‘시티센터 앙코르’ 시리즈는 약 삼십년 전의 문제작이었던 이 작품을 선택했다. 브로드웨이 극장보다 더 좁은 좌석 간격으로 악명 높은 시티센터지만 시야장애석까지 남김없이 팔려나가는 매진사례를 기록하며 곧 바로 브로드웨이 행이 결정됐다. 여전히 냉소적인 대사들로 가득 했던 2막은 극작가 데이빗 톰슨이 가세해서 지극히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 장면들마다 두 주인공에 대한 애정과 유머감각을 녹여냈다. 데이빗 톰슨은 작곡가 존 칸더와 작사가 프레드 엡의 브로드웨이 데뷔작인 〈극렬 빨갱이 플로라 Flora the Red Menace(1965)〉의 대본을 썼던 극작가로 두 콤비의 마지막 작품인 〈스캇보로 보이즈〉까지 함께한 사람이다. 초연 때 넝마 같다는 소리를 들었던 죄수들의 의상을 세련되게 재해석하고 밴드를 무대 한가운데 자리하게 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이곳이 마치 벨마 켈리가 공연 중인 캬바레인 듯한 느낌을 선사했다. 그 사이에 관객들도 성장했다. 브레히트 방식의 이야기 도중에 난입하는 엠씨의 존재를 이제는 드라마를 깨는 존재가 아니라 즐거운 장치로 받아들였다. 마치 한물간 뮤지컬 영화가 이제는 새롭고 신선한 형식으로 받아들여져 다시금 부흥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롭 마샬 감독이 감독한 뮤지컬 영화 〈시카고〉는 2003년 오스카 작품상을 거머쥐면서 뮤지컬 영화 〈올리버!〉가 1968년 작품상을 탄 이후 35년 만에 뮤지컬 영화의 메인스트림 복귀를 알렸다. 뮤지컬 영화는 오랫동안 비현실적이고 클리셰가 된 지 오래인 장르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민권운동과 베트남전으로 인한 반전운동이 세상을 뒤덮었는데, 뮤지컬 영화 속 세상은 여전히 눈이 마주치면 사랑에 빠지고 나 잡아봐라 하하호호 웃는 총천연색의 꽃밭처럼 보였다. 뮤지컬이 음악 장르로는 록 음악을 따라잡기 위해 애쓰고, 내용에서도 당대의 사회현실을 은유로 담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버린 뒤였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뮤지컬은 오랫동안 묵혀진 덕분에 새로운 장르로 다시 태어났다. 대사들 속에 갑자기 장면이 바뀌면서 등장인물들이 비현실적인 꿈을 꾸며 노래를 시작하고 그 노래 한 곡 부르는 중에 다양하게 배경과 의상이 확확 변하는 모습 자체가 새로운 형식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할리우드의 뮤지컬 영화의 전성기였던 1940~1950년대의 스타일이 인도로 가서 발리우드 영화의 근간이 되어 극단적인 비현실적인 감각을 추구하며 자체적인 스타일을 완성했다면 발리우드의 극단적인 비현실적인 장면 구성이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와 재해석 된 셈이다. 이러한 형식은 2008년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뮤지컬 영화 〈시카고〉는 관객으로 하여금 극장이지만 라이브 무대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연출을 통해 무대 공연에 대한 갈증을 불러오는 수작이었다.
내용에 있어서도 처음 개막했던 1975년의 관객들이 살인을 하고도 무죄를 받고 죄책감 하나 없이 태연히 걸어 나가 자신의 삶을 만끽하는 여성들에게 분노했다면 리바이벌 작품에서는 관객들은 벨마와 죄수들이 부르는 ‘Cell Block Tango’에 열광했다. 여자친구를, 아내를 때리면서 남성들이 가장 먼저 입에 올리는 ‘네가 나를 화나게 하지 않았다면’을 똑같이, 그리고 뻔뻔할 정도로 태연하게 뱉어내는 여성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관객들은 대리만족과 변해가는 세상의 파도를 느꼈다. 게다가 ‘리얼리티 쇼’의 원조인 미국답게 ‘유명인’이 된 두 주인공이 마지막에 살인자였던 자신들의 경험을 팔아 스타가 되는 모습에 환호했다. 이 작품은 소위 미러링의 선구작인 셈이다. 리바이벌 버전의 놀라운 점은 살인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등장인물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덕분에 한국에서도 여배우들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은 해보고 싶어 하는 작품이 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원작자인 모린 왓킨스는 시카고 트리뷴지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자신이 목격했던 실제 사실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연극으로 만들었다. 이후 모린 왓킨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된 이후 살인자들의 무죄방면에 자신의 기사가 일조한 면이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 작품이 뮤지컬이라는 더 큰 장르로 만들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유산관리회사는 배우 그웬 버돈과 연출가 밥 파시와의 오랜 협상 끝에 저작권을 판매하기로 결정한다. 덕분에 우리는 오늘 이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1914년 왓킨스는 자신의 고등학교 졸업사진에 “큐피드의 화살을 맞지 않기로 했다”고 적었고 독신을 지켰다. 그 시절에는 흔하지 않았던 비혼주의자였던 왓킨스의 사랑의 열정을 믿지 않되 삶은 사랑하는 인생의 신조가 결국 그가 믿지 않았던 뮤지컬을 통해 구현된 셈이다.
INFO
일시 2021. 8. 13.~8. 15. (금) 19:30 (토) 14:00, 18:30 (일) 14:00
장소 김해문화의전당 마루홀
연령 14세 이상
좌석 V석 140,000원 / R석 120,000원 / S석 90,000원 / A석 70,000원
문의 055-320-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