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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 역사 오페라의 새 가능성 보여준 오페라 〈허왕후〉
오페라 <허왕후> 초연 공연 리뷰

한국 창작오페라의 역사는 한국 오페라 역사와 나이가 같다. 한국 최초로 베르디 〈춘희〉(라 트라비아타)가 서울 시공관에서 공연된 1948년, 작곡가 현제명은 야심적인 창작오페라 〈춘향전〉을 완성했고 2년 뒤 초연했다. 73년에 이르는 한국 창작오페라의 역사는 그만큼의 한계도 보여 왔다. 거듭 무대에 오르면서 음악팬과 대중의 기억에 뿌리를 내린 창작오페라는 손에 겨우 꼽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사료 속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역사 오페라’의 경우 사정은 더욱 좋지 않았다. 주인공의 기념비적 성격에 작품이 함몰되어 청중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매력을 찾아내는 데 한계가 컸다. 그러므로 김해문화재단이 8~10일 김해문화의전당 마루홀에서 공연한 오페라 〈허왕후〉는 사랑과 음모가 어울려 흥미를 견인하며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역사 오페라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가볍게 볼 수 없는 의미를 갖는다.

김숙영의 대본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허황옥 상륙 이전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조립해 두 주인공의 사랑에 설득력 있는 옷을 입혔다. 허황옥은 가락국과 아유타국의 문명 교류에 핵심 역할을 하는 호기심 많은 인물이자 김수로왕의 즉위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무대는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상부와 검(劍)을 형상화한 수직의 조형물을 기본으로 각 장면에 특화된 배경이 더해져 청중이 상상력을 열어갈 여유로운 공간을 제공했다. 이런 배경 위에 펼쳐진 작곡가 김주원의 음악은 무엇보다 선율 면에서 귀를 붙들었다. 김주원의 멜로디 구성에 대한 재능은 유명 성악가들이 앞다퉈 공연 프로그램에 올리는 창작가곡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등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어왔다. 오페라 〈허왕후〉에서도 그는 그 재능을 십분 입증했다. 갈망과 도전, 갈등의 상념들은, 색깔이 뚜렷하고 고답적이지 않은 화음진행 속에 매력적인 선율로 적합한 옷을 입었다.

3막 디얀시의 아리아 ‘웃음보다 울음이 더 많았던 날 중에’는 극의 플롯에서 자유로운 가사를 선택한 대본작가의 배려 덕에 갈라콘서트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상황에서 서정가곡처럼 자유롭게 불릴 수 있는 아리아로 탄생했다.

작곡가가 이 작품에서 선택한 음악언어는 다중양식(多重樣式)적이라고 할 만했다. 장면마다 유럽의 왈츠, 중남미의 하바네라, 20세기 캅카스 지역 발레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음악적 이디엄이 녹아들었다. 허황옥의 도래가 문명교류의 역사를 상징하는 이야기인 만큼 다른 역사소재에 비해 부담이 적은 선택이다.
곡에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다. 1막 2장, 허황옥이 김수로에게 매력을 느끼는 부분은 거의 변화 없이 시종 빠른 왈츠로 처리되었다. 사랑의 장면으로 여운이 긴 음악언어라고 하기는 어렵다. ‘구간(九干)회의장면’에서는 쿠바의 하바네라 리듬이 사용되었는데 신선한 아이디어였지만 음색까지 비제 ‘카르멘’의 하바네라와 유사해 ‘카르멘’의 강렬한 인상을 벗어날 수 없었다.
중창의 역할은 뒤로 물러섰다. 허황옥과 김수로, 허황옥과 디얀시, 김수로와 이진아시 등 수많은 앙상블의 장면이 있지만 본격적인 중창보다 대부분 번갈아 부르는 대창(對唱)의 성격에 머물렀다. 오케스트레이션에선 금관이 각 악기의 개성 있는 음색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으며, 이국적인 장면들에는 글로켄슈필(철금)에 과도하게 의존했다. 다양한 음색의 활용이 아쉬웠다.
허황옥의 고향 아유타국을 연상시킬 음악적 이디엄이 뚜렷하지 않은 점이 생각할 여지를 남겼다. 의도적인 결과일 수도 있다. 당시의 아유타국이 오늘날의 어느 곳인지에 대해 사학계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비의 서쪽’을 추상적으로 형상화하는 화성이나 음색, 멜로디, 리듬의 특색을 부여해 몇 부분 상징적인 동기를 삽입하기만 했어도 분명한 색깔을 청중의 뇌리에 각인했을 것이다.
가야금을 연상시킬 음악적 소재가 등장하지 않은 점은 한층 더 숙고해볼 만했다. 이 부분은 어떻게든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왔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륵의 가야금은 김수로왕보다 5세기 뒤에 등장하지만, 2막 2장 허황옥의 처소 장면에서 가야금을 떠올릴 선율이 들렸으면 맞춤했을 것이다.

필자가 감상한 10일 공연 현장으로 들어가 보면 허황옥으로 출연한 소프라노 김성은은 사랑의 설렘과 음모를 깨부수는 강력함, 새나라를 열어가는 환희 등을 공명점의 적절한 변화로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김수로왕 역 테너 박성규의 온화한 노래와 석탈해 역 테너 서필의 뚜렷한 음색이 좋은 대조를 이루었고, 디얀시 역 소프라노 박정민은 배신의 아픔을 서정적인 음색으로 호소했다. 이와 함께 이진아시 역 바리톤 박정민, 특히 신귀간 역 베이스 박준혁의 압도적인 성량을 특기해둘만 했다.

출연자들의 진행 동선은 자연스러웠고 연기에 들인 공도 역력했지만 일부 장식적 역할 이상을 드러내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석탈해의 음모가 드러나는 부분이나 디얀시의 희생 장면에서는 구간(九干)들이 한층 뚜렷한 놀라움과 실망의 감정표현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또는, 이 장면에서 백성들의 합창을 함께 도입할 가능성도 검토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전곡의 갈등이 최고도로 고조되는 부분이지만 이에 걸맞은 장면적 긴장은 부족했다.

2막 1장 뒤 휴식시간(인터미션)이 진행되고 2막 2장으로 이어진 점은 설득력이 부족했다. 각각 ‘남성들의 장’과 ‘여성들의 장’으로 공통점도 찾기 힘든 만큼 막 구분을 재조정할 만했다. 넘버링(번호붙임)의 변경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이번 공연은 출연진의 88%가 지역 예술인으로 채워졌다. 지역의 예술적 자립도를 제고한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반주부는 이번 연주를 위해 조직한 ghcf페스티벌오케스트라를 장윤성이 지휘했다. 1월에 연습을 시작한 만큼 호흡을 맞춘 기간이 충분하지 않아 현악부의 세공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원곡 악보 자체가 오케스트라, 특히 금관부에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구하지 않았다. 앞으로 계속 앙상블이 발전하리라고 생각된다.

역사시대를 배경으로 한 극에서 당시에 사용되지 않았던 현대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고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해상교류가 왕성했다오’, ‘고성 지역에 야철 제작소를 세우고’ 같은 표현들은 이런 점을 고려해도 적잖이 생경하게 들렸다. 예를 들어 ‘바다로 자주 왕래해왔다오’, ‘고성 땅에 이 주물 기술들을 가져가고’처럼 더 입말에 가까운 표현들을 제안해본다.

작성일. 2021.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