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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쇼팽>
쇼팽의 시간은 백건우를 타고 흐른다

피아노의 세계에서 쇼팽 음악에 정통하지 않으면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다. 60년 이상을 음악에 몸 바쳐온 백건우(1946~)에게 쇼팽의 음악은 언제나 중요한 작품이다. 백건우가 쇼팽의 고국 폴란드의 지휘자 안토니 비트, 바르샤바 교향악단과 함께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1번>과 <협주곡 2번>을 녹음하여 2003년에 발표한 음반에서 백건우의 연주는 그가 당대 내로라하는 쇼팽 해석자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백건우는 그 후 브람스, 슈베르트의 앨범을 내놓으며 한동안 쇼팽과는 멀어져 있었다. 2017년 가을, 서울에서 두 번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리사이틀을 마친 백건우의 시선은 쇼팽을 향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2018년 8월, 그는 이탈리아 볼차노에서 쇼팽의 <즉흥곡>, <녹턴>, <왈츠>, <환상 폴로네이즈>로 구성된 리사이틀을 가졌다. 이어 가을에 두 장 짜리 앨범에 쇼팽의 <녹턴> 21곡을 담아 세상에 내놓는다. 야상곡이라 불리는 <녹턴>에 대해 그는 “쇼팽 자신의 내면적인 모습을 자백하는 소품이 야상곡이며, 그의 내밀한 감성과 본질이 담겨 있는 작품들이 바로 쇼팽의 소품들”이라며 쇼팽과 함께 우리 곁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오는 12월 14일 토요일, 김해문화의전당 마루홀에 오르는 <백건우×쇼팽>은 여섯 곡의 <녹턴>(야상곡)이 중심을 이룬다. 또한, 쇼팽의 정수가 담긴<즉흥곡>, <환상 폴로네이즈>, <화려한 대왈츠> 등이 함께하여 12곡이 연주될 예정이다.

쇼팽의 음악을 노래하는 피아니스트

<녹턴>은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의 음악을 접하게 되는 시작점이자 정수이다. 쇼팽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그의 곡인 <녹턴>을 듣고 반하는 일이 많다. 쇼팽은 후배들에게 “음악은 노래와 같아야 한다.”, “피아노로 노래를 부를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의 생각이 잘 담긴 작품이 <녹턴>이다. 실제로 녹턴의 선율은 쇼팽을 매료시킨 이탈리아 오페라 명가수들이 구사한 콜로라투라와 벨칸토 가창을 흉내 낸 음악이다(콜로라투라, 벨칸토 모두 소프라노가 화려한 고음을 구사하는 창법이다). 노래에는 인간만의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 심리가 담겨 있다. 부르는 사람의 체격, 연령, 숨 쉬는 법, 기질, 성격이 노래에 반영된다. 같은 노래여도 다양한 느낌으로 표현되는 이유다. 노래에서 유래한 쇼팽의 <녹턴>처럼 피아니스트에 의해 템포와 표정이 바뀌는 음악도 흔치 않다. 가슴의 정신과 손끝의 기술이 이상적으로 원숙한 현재의 백건우라면 쇼팽의 또 다른 명작인 <에튀드>(연습곡) 시리즈를 선택하여 좀 더 쉬운 길을 가는 것도 방법이었을 텐데, 백건우가 쇼팽과 함께 하는 행보에 <녹턴>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음악의 시간은 백건우를 타고 흐른다

2018년부터 시작된 백건우와 쇼팽의 여정에는 백건우가 쌓아 올린 모든 노력과 시간이 함께하고 있다. 특히 백건우 특유의 박자 감각과 흐름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다. 그의 연주 기교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가슴과 정신이 빚어내는 시간의 흐름이 대단해서이다. 음악사의 낭만주의기를 대표하는 쇼팽은 다수의 작품에서 ‘루바토’ 표현을 사용했다. 루바토란 연주자나 지휘자의 재량과 기분에 따라 의도적으로 템포를 느리게 혹은 빠르게 연주하는 것이다. 왼손은 음악의 정확한 템포로 연주하는 한편, 오른손은 루바토를 적용해 자유로운 템포로 연주하는 것이다. 백건우가 사랑한 슈베르트, 스크랴빈도 루바토를 통해 연주자의 자유와 감성을 존중했다. 쇼팽에 루바토를 거는 백건우의 박자 감각은 그 누구보다도 여유롭다. 때론 몇 할이 길기도 하다. 통상 피아노 작품은 느린 박자로 시작하여 점점 속도를 올려 연주한다. 그러나 쇼팽의 작품들은 느린 흐름이 연주자를 더 어렵게 한다. 왜냐하면 박자를 늦추면 그 안에 빼곡하게 담긴 음표들이 하나하나의 표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는 빠른 속도로 훑으면 드러나지 않는 표정들을 더욱 신경 써야 하는 것이다. 특히 느리게 흐르는 쇼팽의 <녹턴>은 더욱더 그러하다. 백건우의 쇼팽, 그중 <녹턴>은 여유롭고 느리다. 그는 무한대의 포용력으로 온화하게 그 소리를 모두 껴안는다. 이번 리사이틀의 1부는 6곡 중 4곡의<녹턴>이 배치되어 이러한 분위기를 진하게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다. 이어지는 2부의 6곡 중 <녹턴>은 2곡이다. 이외 화려한 왈츠와 발라드로 구성되었다. 1부의 고요함과 안정감, 2부의 격렬함과 즉흥성이 대비되는 구성이다.

그의 음악은 곧 ‘인간학’이다

백건우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하나의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 작곡가의 인생과 모든 작품을 파악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집하고 예술관으로 삼고 있다. 악보 외에 작곡가들이 남긴 편지와 일기, 자필 악보 등을 샅샅이 훑으면서 작품이 창작된 계기와 의도, 곡이 완성될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주변 환경의 변화 등을 탐구하는 그의 모습은 때로는 ‘음악을 위한 인류학자’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나의 작품을 만나기 이전에 그 작품을 낳은 작곡가의 인생에 접근하는 백건우의 자세는 ‘음악이란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류학과 무엇이 다르냐’라고 묻는 것 같다. 백건우의 음악은 늘 ‘인간’을 향해 있다. “결국, 예술이라는 것이 언제나 우리 안에서 시작하기에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하죠. 예술 자체가 인간이 하는 것이고, 인간 내면을 초월한 더 큰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연주를 위해 무대에 올랐을 때 시간과 공간, 청중의 관계는 달라 집니다. 저의 음악은 상황과 사람에게 맞춰야 합니다. 음악은 휴먼 드라마 잖아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예술이니까.” 그에게 연주란 앞서 비유한 ‘인류학’인 동시에 ‘인간학’이기도 하다. 내가 백건우라는 이름 앞에 피아니스트라는 직업 외에 연주인류학자, 연주인간 학자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을 때가 많은 이유다.

글 송현민 음악평론가 사진 제공 SeongJin Oh
글 송현민 음악평론가 사진 제공 SeongJin Oh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음악가들을 만나며 책상과 객석을 오고 간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했고 한반도의 르네상 스를 주장했던 '박용구론(論)'으로 <제13회 객석예술평론상> 을 수상했다. 집필, 강의, 방송 활동을 통해 여러 대중과 소통 하고 있다.

작성일. 2019. 12.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