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봉황동 유적은 금관가야의 왕성 혹은 왕궁지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유적의 북쪽에 위치한 대성동고분군이 금관가야 왕들의 무덤, 즉 죽음의 공간이라면, 봉황동 유적은 그들이 생활하였던 삶의 공간이었다. 유적은 봉황대 구릉을 포함한 회현리 패총 일대로, 당시 해안가(古김해만) 근처에 입지하였다. 『영남읍지』 제14책 김해읍지에서는 수로왕궁터가 조선시대 읍성 서문 밖 호현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지금의 김해시 회현동 일대로 추정된다. 봉황동 유적 일대는 1907년 이래로 80여 차례 시굴 및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사적으로 지정·관리 되고 있다. 조사 결과, 봉황동 유적 외곽을 감싸는 성곽유적으로 추정되는 봉황토성, 옛 선박 부재와 노가 발견된 추정 접안시설, 고상건물지, 패총(조개무지), 제철로 등 금관가야의 다양한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에서 조사 중인 김해 봉황동 유적(315-1번지 일원)은 봉황대 구릉 동쪽 사면에 위치하며, 조사구역에는 ‘가락국시조왕궁허’ 비석이 세워져있다. 최근 조사에서 특히 중요한 성과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 금관가야 전성기였던 4세기대의 너비 약 10m의 대형 건물지군을 확인하였으며, 그 구조도 일부 파악할 수 있었다. 김해 일대에서 찾아보기 힘든 초대형의 규모로, 건물지의 구조가 아주 특별하진 않지만, 이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지가 군집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건물지와 공간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건물지군의 북쪽으로 약 40~50m 떨어진 지점에서, 1,600년 전 조개껍질을 섞어 최대 4m 높이로 쌓아올린 대지조성층(패각성토층)이 확인되었다. 중장비도 갖추지 못했던 시기에 이러한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인력과 재화가 투입되었으며, 이를 관리·통제하는 권력집단도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대규모 토목공사의 정황과 수장층의 존재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최상위 계층묘인 대성동고분군 출토품과 흡사한 제사용 토기 등 최고급 유물이 다수 확인되었다. 작년 조사에서는 대지조성층(패각성토층) 아래의 유기물층과 구상유구(도랑)에서 1세기 대 고급 옻칠 그릇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유기물층과 구상 유구는 각종 초본류, 목재, 패각 등이 뒤섞여 있었고, 저습한 지대이기에 칠기와 목기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발견될 수 있었다. 수장층급 무덤이 아닌 생활유적에서 출토 사례가 드문 제사용 고급 칠기 등이 최다량 조사된 점은 금관가야 중심지로 알려진 김해 봉황동 유적이 기원 전후부터 변한의 중요 거점이었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조사 성과들을 종합해보면, 봉황동 유적은 금관가야의 중심지에 걸맞은 유적이라 할 수 있으며, 왕성임을 밝힐 수 있는,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앞으로의 성과가 기대되는 곳이다.
가야사 연구는 문헌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당시의 과거를 복원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가야사 이해를 위해서는 고고학적 실체에 대한 발굴조사와 그에 따른 연구, 철저한 고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핵심 문화유산인 가야의 왕성·왕궁을 밝혀내는 것은 고대국가로서의 가야의 위상을 높이고, 역사성과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길이다. 이는 시민들과 나아가 국민들이 이러한 역사문화환경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 의미와 필요성을 인식하여, 함께 나아가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 지자체, 문화재단 등이 역사적 공감대 형성을 이루고자 문화유산 공개·활용 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해나가야 한다. ‘알고, 느끼며 함께하는’ 발굴유산의 다양한 스토리라인과 프로그램을 개발·공유하는 것은 역사교육의 장이자, 김해시 문화관광의 경쟁력 강화와 특색을 살리고, 지역브랜드 구축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소에서는 22년부터 매년 현장공개설명회를 진행해왔다. 많은 주민분들께서 직접 발굴현장을 보고 설명을 들으면서 유적에 대한 이해와, 조사가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이해하신다. 또 유물을 직접 보고 만져보면 엄청 흥미로워하고, 유적의 중요성과 가치를 느끼는 모습을 보게된다. 이와 더불어 국립가야역사문화센터에서는 매달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 진행 전후로 주민들의 역사적 관심과 이해도가 크게 달라졌음을 느낀다. 가야고분군 세계유산에 김해 대성동고분군이 등재되고, 김해 봉황동 유적이 신문기사, 언론매체 등에 활발히 등장했던 것도 역사적 가치 전달에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선순환 과정을 위해서 연구소에서는 김해 봉황동 유적에 대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조사·연구 종합계획을 수립할 예정이다.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연구, 분석 등을 통해 가야 왕성의 실체를 밝힐 계획이며, 조사 성과와 학술적 가치를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 공유의 기회를 꾸준히 마련해나가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