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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문화관광의 발전에는 김해학이 필요하다
김해문화관광재단
글.인제대 명예교수, 김해학연구원 원장 이영식

김해를 모르는데 김해의 문화관광은 물론, 나아가 김해의 발전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세모시 옥색 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로 시작되는 우리 가곡 ‘그네’를 아는 김해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구나 이 ‘그네’의 작곡가가 김해 사람 금수현(1919.7.22~ 1992.8.31.)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욱 많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지금은 그의 아들 금난새 지휘자가 더욱 유명할 수도 있겠다. 언젠가 새로 조직했다는 「금난새 유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와서 김해문화의전당 마루홀에서 공연하면서 자신이 김해와 깊은 인연이 있다고 밝힌 적이 있지만, 그 정도에 불과했다.

금수현 선생이 김해 거의 모든 초·중등학교의 교가를 무상으로 작사·작곡해 주었다는 사실은 해당 학교의 홈페이지에서 간단히 확인되는데도 정작 그 학교 출신자들조차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 금수현 선생은 원래 ‘후 김해김씨’의 김녕‘김(金)’씨였다. 철의 왕국 금관가야의 후예였기 때문에 쇠 ‘금(金)’으로 성을 바꾸었고, 자신이 음악을 하는 가야금 금관가야의 후손이니 가야금의 ‘금(金)’으로 한자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김해 문화의 독특한 자산이 되고, 김해시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이렇게 훌륭한 김해의 문화적 자산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금수현 선생은 원래 김해였던 낙동강 변 김해군 대저 출신이었다, 자신을 김해 사람이라 주장하고, 성까지 금관가야의 금으로 바꾸었으며, 언젠가는 KBS-TV <내 고향 지금은>에 출연해 김해 대저 사덕마을의 생가를 비롯해, 수로왕릉과 허왕후릉, 비닐하우스와 농촌 풍경 등의 김해 풍경을 고향으로 소개하기도 했던 김해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김해의 금수현 선생을 부산에 빼앗기고 있다.

부산은 1988년에 낙동강 서쪽 제방에 아들 금누리 씨가 디자인한 ‘그네’ 노래비를 세우고, 2013년께 부터는 강서구청 뒷길을 ‘금수현 거리’로 지정하였으며, 도로도 붉은색으로 포장해 차별화하면서, 이 일대를 ‘금수현 음악도시’로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행정구역의 변화로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생가 인근의 일제강점기 대저수리조합 터를 '금수현 음악 공원'으로 꾸미고, 전국 규모의 '금수현 가곡제'를 개최하기 시작하였으며, 아들 금난새 지휘자의 협조로 공연과 강의를 개최하면서, 방학 중에는 인근 초등학교에서 '음악캠프'를 개최하기로 했단다.

금수현 생가 일대의 강서구뿐만 아니다. 선생이 잠시 생활했었다는 중구 산복도로 망양로에도 '금수현의 음악살롱'을 열었다. 2013년 7월 25일 개관한 지상 2층 건물로 1층에 소공연장, 2층에 북카페를 갖추어, 지역주민을 위한 소규모 공연과 독서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주민들의 '문화쉼터'로서 금수현의 가족 창작가곡제, 시 낭송과 가곡의 밤, 선생 이야기 중심의 그림책 창작 등과 같은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여름엔 무더위를 피하는 지역주민들의 문화무더위쉼터로서 주말과 휴일 작은 콘서트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 개최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금수현 선생이 사랑했던 김해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김해의 인물만 그렇던가? 김해의 땅에는 작은 돌부리 하나에도 오랜 역사와 사연이 있다. 김해의 백운대를 아시는가? 백운대라면 서울 북한산 백운대를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저 금강산과 오대산에도 있고, 경주나 문경에도 있다. 역사적으로 명산이나 고도에서 전망이 탁월한 곳에 곧잘 붙여지던 이름이었다. 김해 백운대 역시 김해 시가지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롯데캐슬가야 1단지 107동 맞은편 가야로 건너에 자리한 백운공원 또는 구산동백운대고분으로 알려진 곳이다.

김해천문대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온 말단 구릉에 봉긋하게 혼자 솟아올라, 김해 답사객들이 분산 만장대에 오를 시간이 없을 때, 이곳에서 김해시가 전경을 만끽하면서 김해를 이해하는 쌈지공원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여기서 곧잘 놀기도 했던 이른바 ‘김해 토박이’란 분들조차도 백운대 이름은 몰랐단다. 그런데 이 백운대란 예쁘고(?) 역사적인 이름이 사라질 뻔한 적이 있었다. 1987년 시작된 동상·대성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에 휘말려 백운대 전체가 깎여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었다. 마침 여기에 김해가 가야에서 신라로 바뀌었던 역사를 웅변해 주는 구산동백운대고분이 버팀돌이 되었다. 원래 1963년에 국가사적(75호)으로 지정된 구산동고분군 중 하나였으나, 존폐와 이전 여부를 둘러싸고 갖은 시련을 겪다 간신히 살아남는 과정에서 ‘백운대’의 이름이 남았다. 백운대도 고분도 모두 깎아 치우자는 조합원들의 달걀 세례를 이기고 역사적 현장을 시민 공원으로 남기길 잘했다는 사연을 아는 시민이 얼마나 될까?

김해시의 인구는 근년 30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시‧군의 15만에서 56만으로 불어났다. 불어난 인구의 다수는 당연히 타지 분들의 이주에 의한 것이었다. 방금 타지에서 온 분들이 김해의 역사와 문화를 모른다고 탓할 수도 없고, 김해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에게 김해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발전 방향을 고민하라는 건 언어도단이다. 더구나 ‘김해 토박이’란 분들조차도 김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미지와 오해가 적지 않다. 새로운 주민들에게 김해를 전파하고 오래된 토착민들의 오해를 수정할 수 있는 기회와 정책으로서 ‘김해학’의 연구와 전파가 필요하다.

요즈음 ‘김해학’의 필요성을 인식한 기관, 학교, 시민단체들이 ‘김해학 강좌’를 열기 시작한 것은 두 손 들어 환영해야 할 일이다. 다만 그 강사진과 강의 내용을 보면 잘못된 가야사 인식에서부터 문제투성이인 사랑방 이야기 정도인 경우도 적지 않다. ‘김해학’으로 김해시민에게 김해를 알게 하고, 김해의 정체성 확보를 통해 김해시민에게 우리 동네의 자부심을 갖게 하려던 원래의 취지에 역행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일정한 교과 내용과 강사의 수준을 보장하면서 다양한 김해의 역사와 현안을 종합적으로 고민하고 전파할 수 있는 김해학 아카데미의 개설과 운영이 필요하다. 김해문화관광재단이 김해의 문화관광은 물론, 김해의 발전에 토대가 되는 김해학의 전파에 힘찬 지성의 깃발을 들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작성일. 2025. 03.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