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는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물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뜻하는 단어다. 이 단어는 다양한 상황에서 맥락에 맞게 사용되는데, 예를 들어 ‘개에게 물린 자리가 흉터로 남아 있다’, ‘자리를 양보하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만났다’ 등이다. 그러나 이는 일반적인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자리는 공간을 담고 있다. 공간(space)은 역사와 가치, 경험과 기억 등이 한데 의미 있는 장소(place)가 된다.
2021년 12월 17일, 전국의 여성기획자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김해로 가는 KTX에 올랐다. 꽤 긴 시간을 달려 진영역에 내렸는데, 초행길에 역대급 길치인지라 행사장소인 하라 식당으로 가는 데만 2시간가량이 걸렸다. 30분이면 되는 거리를 2시간이나 걸려 가는 동안 김해농공단지를 비롯한 김해라는 낯선 도시의 풍경과 심리적 거리를 좁혀갔다.
우여곡절 끝에 하라식당에 도착.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내가 생각했던 그림과는 사뭇 달라 당황했지만 이내 나온 맛있는 저녁식사 덕에 당황스런 마음을 곧바로 추스를 수 있었다. 식사를 하며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분들을 둘러보니, 문화재단 및 문화도시에서 활동 중인 여성 리더 및 실무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 순간 오늘 자리에 대한 정보가 충분치 않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리에 집중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오늘 이곳 김해에, 전국의 문화재단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처음으로 모였습니다.” 손경년 김해문화재단 대표이사님의 첫말이다. 그동안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교류했지만,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라는 뜻이었다. 그 말 속에 오늘 이 ‘자리’가 이미 ‘공간’이 되었음이 담겨있었다. 정해진 주제에 따라 발제자와 토론자가 있지 않았고, 여기 있는 모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면 그것이 주제가 되고 발문이 되어 토론으로 이어졌다. 다만 모더레이터(최혜자 문화디자인자리 대표)가 있을 뿐이었다.
2018년 미투 운동이 시작되고 난 후, 문화예술계는 다양한 영역과 분야에서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고발하며 그동안 쌓여있던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 흐름 속에서 문체부는 ‘성평등 문화확산 네트워크 지원사업’을 2018년부터 추진하고 있는데, 문화디자인자리는 2019년과 2020년 두 해에 걸쳐 사업을 진행했다. 또한 2021년부터는 자발적인 활동으로 ‘성평등 문화예술 네트워크’를 이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국의 문화재단을 포함해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여성에 대한 성희롱・성폭력 사건들을 접했고, ‘공공에서 이 정도인데 민간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성’은 어디에서 일하든 사회구조 속에서 사회적 약자로서 중첩된 교차성에 놓이게 된다. 오늘 자리에서, 여성은 비단 성희롱・성폭력과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뿐만 아니라, 문화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에서도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남성에 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를 누가 뭐랄 것 없이 뱉어냈다. 자리를 지키고 자리에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여성은 특별히 무언가를 더 ‘증명’해야 한다고 말이다. 각각 상황을 헤쳐 나가는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연대가 답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연대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나처럼, 그곳에 있었던 모두에게 그날의 자리는 곧 의미 있는 공간으로 남았으리라. 그래서 감사한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