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김해문화재단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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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힘은 부재를 실재로 바꾼다
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인간이 두려움을 느낄 때는 정작 그 대상의 실체를 알지 못할 때가 많다. 미지의 것들은 아직(未) 알(知) 수 없음으로 인간의 영혼을 잠식한다. 부재하지만, 바로 그 부재로 하여 인간의 정신을 압도한다. 부재를 실재로 바꾸는 건 환상의 이다. 어쩌면 인간은 상상력으로 인해 공포에 떨게 되는 게 아닐까. 무대 위에도 그런 존재들이 있다. 부재로 존재를 드러내고, 존재감을 뿜어내는 인물들이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제목에 그 이름이 들어간 타이틀 롤(Titel Role)이면서도, 등장 한 번 않고, 혹은 한두 번의 등장으로 모든 인물을 압도하는 이들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 세 편의 예를 살펴본다.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먼저 오래된 예로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를 꼽을 수 있겠다. 등장인물 줄리어스 시저가 무대 위에 아예 등장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줄리어스 시저>의 주인공이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야기는 시저를 살해하기 위한 모의와 살인, 그리고 시해 이후 벌어진 내전에 중심을 두고 전개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브루투스 너마저”이다.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던 브루투스가 자신의 살인 공모에 가담했으리라고 상상치 못한 시저의 마지막 말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가 번갈아 시해의 정당성과 부당성을 역설하는 장면일 것이다. 시민들은 처음에 브루투스의 주장에 동조하지만, 나중에 안토니우스의 변론에 경도된다. 사족으로 설득의 심리학을 이야기할 때 두 사람의 연설이 종종 인용되니,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아무튼, 이후 시민들은 브루투스와 그 무리를 추방하는 데 힘을 쏟는다. 그래서 안토니우스 연맹과 브루투스 일파의 전쟁은 어떻게 끝났을까? 여기서는 약간의 힌트만 흘리는 게 나을 듯하다.

브루투스는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친다. 그러다 필리피 전투를 앞둔 어느 밤, 그는 꿈에서 시저의 망령과 만나게 된다. 자신을 시저의 악령이라고 소개한 그는 이어 브루투스에게 “필리피에서 나를 보리라”라는 예언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여기까지. 시저는 정녕 독재를 꿈꾸던 황제였을까, 아니면 브루투스의 착각이었을까. 이 글에서 중요한 건,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보다 시저가 더 논쟁적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다음으로 소개할 작품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이 작품에 고도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여기에는 에스트라공, 블라디미르, 포조, 럭키, 소년까지 5명만 등장한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양상은 온종일 끊임없는 잡담을 늘어놓는 것. 그게 그들의 일과다. 그러다 오후가 되면 아마도 늘 그들 앞으로 포조와 럭키가 지나가고, 저녁이 되면 소년이 찾아올 것이다. 연극에서는 이들의 이틀을 보여준다.

앞서 ‘아마도’라며 단정하지 않은 이유는 이렇다. 첫째, 포조와 럭키가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항상 다른 양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포조와 럭키 둘 다 앞을 보지만, 다음 날이 되면 포조가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난밤의 사고 때문이 아니며 아주 오래된 장애라고 이야기한다. 소년 또한 전날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찾아온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들은 왜 매일 같은 장소에서 잡설을 하는 것일까. 이유는 제목처럼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서다. 고도의 전령인 소년은 항상 같은 말을 반복한다. “오늘은 고도가 못 오지만, 내일은 틀림없이 온다고 전해 드리라 했다”라고. 이 때문에 그들이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다. 그렇다면 왜 기다리는 것일까? 고도가 그들에게 자신을 구원해줄 구원자, 다른 말로 신이기 때문이다. 고도는 과연 올까? 아니, 존재하긴 하는 걸까?

뮤지컬 <레베카>

마지막으로 살펴볼 작품은 바로 뮤지컬 <레베카>다. 뮤지컬은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1938)를 원작으로 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레베카>(1940)를 뮤지컬로 옮긴 것이다. 주인공은 ‘나’와 그의 남편 막심 드 윈터, 그리고 집사 댄버스 부인이다. 남편 막심에겐 이번이 두 번째 결혼으로, 전처의 이름이 바로 레베카였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나’가 막심의 저택인 맨덜리 저택에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드넓은 저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지워지지 않은 전처 레베카의 흔적들. 가구며 소품 등 전처 레베카의 취향이 묻어나지 않는 게 없는데 그녀는 아예 집안 곳곳에 자신의 이름 앞글자 ‘R’을 심어놓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아니 확실한 흔적은 집사 댄버스 부인일 것이다. 레베카의 충복인듯, 아니 죽은 레베카의 분신 혹은 후신이라도 되는 듯 댄버스 부인은 새로운 안주인인 ‘나’를 질투하고 무시하고 적개심을 드러낸다. 급기야 댄버스 부인은 ‘나’에게 자살까지 종용한다. 이 저택에서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건 댄버스 부인이 아니다. 여기서 소설의 문장을 인용하겠다.

“만약 맥심이 사랑하는 여자가 런던에 있다면 나는 그 여자와 싸울 수 있다. 우리의 출발점은 똑같을 테니, 나도 겁날 게 없다. 그 여자에 대한 분노와 질투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언젠가는 그 여자도 늙고 지쳐서 겉모습이 변할 테고, 맥심은 더는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레베카는 영원히 늙지 않는다.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일 것이다. 나는 그런 그녀와 싸울 수 없다. 나에게 레베카는 너무 막강한 상대다.”

그렇다. 레베카야말로 부재하면서, 부재하기 때문에 더 막강할뿐더러, 극복하기 어려운 대표적인 인물인 것이다. 이제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댄버스 부인의 의도대로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될까? 아니면 ‘나’라는 이름 대신, 드 윈터 부인 칭호를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누군가의 부인이라는 호명 안에서의 삶은 과연 행복한 삶인가?

앞서 ‘부재를 실재로 바꾸는 건 환상의 힘’이라고 했다. 환상이 걷히고 부재 했던 대상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대개의 공포심, 두려움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인간에게 상상력만큼 중요한 건, 어쩌면 사실을 확인하려는 의지, 진실을 대면할 용기일지도 모르겠다.

작성일. 2020. 0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