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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자 슈만이 다가오다
슈만의 탄생 210주년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목소리가 높다 보니, 슈만의 탄생 210주년을 잊고 지나 갈 뻔했다. 베토벤(1770~1827)이 고전주의를 대표한다면, 로베르토 슈만(1810~1856)은 글과 음악으로 낭만주의를 온몸으로 구현하며 살다 간 인물이다.

문학과 음악에 빠진 법학도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전공에는 전혀 뜻이 없는 청년이었다. 오히려 음악과 문학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전공인 법학과 자신의 열정이 향해 있는 음악, 문학 사이에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던 슈만은 1829년 마음을 다잡고 법학에 몰두하고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적을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도리어 프랑크푸르트에서 파가니니의 곡과 연주에 매료되어 음악가의 길을 걷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그리하여 슈만은 당대의 명망 있는 음악 교육자이자 훗날 장인이 되는 프리드리히 비크(1785~1873)의 집에서 기거하며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는다. 하지만 오른손에 곧 마비가 왔다. 꿈을 접은 그는 작곡으로 방향을 틀었다.

평론가이자 혁명가

실패한 피아니스트는 24세가 되던 1834년에 『음악신보』를 창간하며 음악평론가의 길로 들어선다. 발행 초기 1주일에 두 번씩 나온 『음악신보』에는 매 호 셰익스피어, 괴테, 장파울 등 유명 작가들의 명언이 소개됐다. 내용적으로는 음악작품 비평뿐만 아니라 음악미학, 음악가 전기, 음악사에 관한 논문을 비롯하여 국내외 음악계 소식도 실었다. 그뿐만 아니라 글을 통해 위대한 음악가들에게 존경을 표했고, 당대를 유행처럼 휩쓸던 기교 위주의 음악들을 거부했다.
슈만은 진보적인 음악운동을 변호하기 위해 ‘다비드 동맹’이라는 가상의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성경에서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비드로부터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는 당시 겉만 화려하고 진정한 예술혼을 보여주지 못하던 속물 음악가들과 자신을 대비시키려는 의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체의 회원들 가운데 이미 고인이 된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가 있었다는 것. 물론 슈만 자신과 베를리오즈, 쇼팽, 프리드리히 비크, 클라라 비크 등도 있었다. 슈만은 당시 유행한 비밀 결사의 관례에 따라 다비드 동맹원들에게 가공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는 이런 가공의 이름으로 발표한 평론들을 『음악신보』에 담았고, 이로써 다른 음악지와 차별화하는 동시에 어느 평론가도 흉내 내지 못한 아우라를 발산하곤 했다. 그러던 중 1836년, 슈만은 비크 교수의 딸 클라라(1819~1896)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7세로 천재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클라라의 아버지이자 슈만의 스승이었던 비크는 두 사람의 교제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1840년 두 사람은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서정적이면서 거친 낭만의 작품들

가곡과 교향곡은 슈만의 대표적인 장르다. 그의 가곡에서 노래와 피아노 연주는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각자의 예술적 독립성을 유지한다. 무엇보다 피아노를 가곡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 슈만은 노래의 앞-중간-뒤에 피아노의 전주-간주-후주를 효율적으로 배치했다. 문학의 가사와 함께 기악의 선율이 빛나는 이유이다.
그가 남긴 가곡 중에는 짧은 노래로 구성된 연가곡 형태가 많다.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인 <시인의 사랑>을 비롯해 <미르테의 꽃>, <여인의 사랑과 생애> 등이 그러하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대표작에 준하는 이 노래들이 1840년에 작곡됐다는 점이다. 이 해는 슈만과 클라라가 결혼한 해다. 사랑한 여인을 신부로 맞이한 슈만은 그간 문학과 음악을 통해 쌓아온 창작열을 온통 자신의 여인에게 바쳤던 것이다.
교향곡을 쓸 때 슈만은 철저하게 낭만주의자의 풍모를 보였다. 그가 쓴 교향곡은 모두 4곡. 고전주의기의 교향곡들을 이상으로 삼되, 고전주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적 통일성보다 주관적이고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낭만적인 열정과 서정성을 불어 넣은 곡들로 유명하다.
슈만이 활동한 낭만주의기 음악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작곡가가 문학적인 제목을 붙이거나,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는 해설을 첨가하기도 한 점이다. 예를 들어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오는 5월 28일 선보이는 독주곡 <아라베스크 op.16>의 ‘아라베스크’라는 말은 ‘아라비아풍의’라는 뜻이다. 본래는 아라비아 공예품과 건축 장식에서 볼 수 있는 넝쿨무늬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슈만은 이 표제를 유럽 음악에 적용한 최초의 작곡가였다. 무대를 장식하는 또 다른 작품 <크라이슬레리아나 op.16>은 8곡으로 구성된 곡이다. 이 곡은 1838년 부활절 전에 완성해 연인 클라라에게 헌정한 곡이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괴로워하고 있던 슈만이 평소 애독하던 호프만의 소설 『크라이슬레리아나』의 주인공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 그 내용을 음악적 상상과 함께 풀어내고 엮은 것이다.

브람스의 스승이기도

브람스(1833~1897)는 슈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에두아르드 레메니의 반주자가 되어 연주 여행에 동행했는데, 그의 음악성에 감동한 또 다른 바이올리니스트 요하임이 슈만에게 브람스를 추천하는 편지를 써주며 슈만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853년, 슈만과 클라라 부부는 20살 청년 브람스를 따뜻하게 맞았고, 그해 슈만은 『음악신보』에 브람스의 재능을 칭찬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 선택된 사람들의 길을 열심히 따라간다면 언젠가는 그 뒤를 이어 이 시대를 최고의 이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소명을 띤 사람이 불쑥 나타날 것이다. 아니,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요하네스 브람스.”
그런 브람스는 스승의 아내이자 14살 연상의 클라라를 사모했다. 이들은 40년간 편지로 마음을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슈만은 말년에 정신병으로 고생하며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고생하던 중 1856년 슈만이 세상을 떠나자 브람스는 홀로 남겨진 클라라와 7명의 아이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브람스는 그런 클라라에게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헌정했다. 정신이 이상해진 슈만이 1854년 라인강에 투신하는 사건이 있었고, 겨우 구출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혼자 남게 된 클라라를 위로 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곡의 중요테마는 슈만의 피아노 소곡집 <다채로운 작품>의 일부에서 따온 것이었다.

작성일. 2020. 0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