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종이·합판·금속 이 모든 곳에 작품 활동이 가능한 회화. 붓이나 나이프로 긁거나 문지르는 힘찬 표현과 손으로 표현하는 부드러움 등 다양한 느낌의 전달이 가능한 회화. 미술적 표현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이 회화 기법은 유화다.
김해시 삼계동 김해시장애인종합복지관에는 유화를 꼭 닮은 이들이 모여 미술 작품을 그려내고 있다. 현재 환경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매일같이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그림에 도전하는 ‘여유회’ 회원들이다.
여유회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들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작가들’이라고 말한다.
운이 좋게도 여유회를 이끄는 심재옥 회장과 송운 총무 두 사람과 연이 닿아 그들의 ‘그림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여유회, 유화에 눈뜨다
2021년 새해 처음으로 소개할 김해의 생활문화동호회는 ‘여유회’다. 신년을 맞이하며 희망찬 마음가짐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코로나19의 확산세가 계속되는 바람에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안전이 가장 최선이기에 서면과 유선으로 진행한 인터뷰. 안타까운 마음 반, 반가운 마음 반으로 문답을 시작했다. 문답에 함께한 이들은 여유회의 심재옥 회장과 송운 총무였다.
김해시 삼계동에 있는 김해시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활동 중인 ‘여유회’는 2008년 ‘여성 장애인 유화 동호회’의 뜻으로 결성된 유화 동호회다. 당시 두 사람은 김해시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미술 치료를 받던 중 취향과 적성에 맞아 담당 선생님(현 김해문화예술단체 띠앗의 이은경 대표)의 도움으로 일주일에 2~3회씩 그림을 그렸고, 그 활동이 여유회의 시초가 됐다. 심재옥 회장은 여유회의 첫 순간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여성 장애인들이 ‘치료’를 목적으로 시작한 소소한 활동이었는데 이제는 전문 선생님을 초빙하고 실력이 향상되어 수업과 상관없이 개개인이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실력에 올랐습니다.”
이에 송 총무는 심 회장의 대답에 동조하며 여유회 이름의 또 다른 뜻을 알려줬다. “여유회의 이름처럼 실제로 취미 생활을 통해 여유를 만끽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즐기며 임한 취미 활동은 각종 대회와 공모전에 출품작을 내는 활동으로 이어졌고, 각종 대회에서 꾸준히 수상하는 등 이제는 회원들의 직업이 되었을 만큼 그림에 애착이 많은 동호회입니다.
여유회는 많은 미술 회화 방식 가운데 유화를 전문으로 하지만, 처음부터 유화를 고집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은 수채화, 포스터, 아크릴 등 다양한 물감을 작업 재료로 사용하며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늘 그림의 수정 문제에 부딪힐 때면 난항을 겪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당시 담당 선생님의 추천으로 ‘유화’에 눈을 떴다. 수채화보다 화려한 색깔과 컴퓨터의 취소 버튼을 누르듯 흰 물감으로 지우면 다시 그 위로 색칠을 할 수 있다는 데 큰 편리를 느낀 것이다. 심 회장은 유화에 대한 자랑거리를 늘어놓았다. “회원들과 계속 물감을 덧칠하는 데서 돌을 올리며 정신 수양을 하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자주 나눴고, 그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또한, 작품이 완성됐을 때 그림의 색이 바래지 않고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것 또한 유화의 큰 장점입니다.”
“여유회는 남다른 열정을 가진 동호회…
서로에게 기꺼이 힘이 되어주는 모습이 아름다워”
붓을 지팡이 삼아 현실을 딛고 일어서다
새해를 맞이한 여유회는 올해로 14년차에 접어든다. 관록 있는 유화 전문 동호회로 자리잡은 것이다. 현재는 코로나19 사태로 모임을 잠정적으로 멈춘 상태이지만, 보통은 10여 명의 회원이 매주 월요일 김해시장애인종합복지관 내의 동아리 실에서 수업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에 송 총무는 “저희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치료와 정신 수양을 목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인지 회원들과의 친목 그 이상의 ‘힐링’에 초점을 맞춰 운영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지체장애 2급인 심 회장과 17년 전의 교통사고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되어 지체장애 1급인 송 총무. 이들이 불편한 몸으로 동호회를 운영하며 긴 시간 동안 와해되지 않고 힐링이라는 가치를 꾸준히 표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로 회원들이 똘똘 뭉쳤기 때문이다. 이에 심 회장은 “아픈 현실을 이겨내고 내일을 살아 갈 힘을 서로에게 준다는 우리의 특징이 계속해서 새로운 꿈을 꾸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발아한 열정, 만개한 실력
“오직 그림으로 말하는 이들… 작품만으로는 장애 여부를 알 수 없어”
심 회장은 동호회 운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을 ‘모임의 시작’이라고 회상했다. “가장 처음 자조 모임을 할 때는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어 모임을 시작하는 모든 것이 어설펐습니다. 특히 미술 용품을 구입하는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탓에 번번이 붓을 놓으려고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김해시에서 저희의 사정을 알아주셔서 미술 용품을 지원해주셨고, 그림에 전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송 총무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2008년 ‘첫 전시’를 떠올렸다. “어색하고 서툰 실력이었지만 작게나마 작품을 축하해주고 싶다는 담당 선생님의 추천에 김해시장애인종합복지관 1층에서 직접 만든 과자와 음료를 준비했습니다. 처음 우리의 그림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축하받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자존감과 자신감이 생겼고 이는 곧 열정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이들의 열정은 점점 실력으로 증명되고,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2016년 전국장애인기능경기 대회에 출전해 수상을 하고, 지난 2018년에 이르러서는 김해도서관의 갤러리가야에서 무려 10번째 작품 전시회를 개최한 것이다. 회원들은 김해시 관계자 및 타 복지관의 센터장 등 많은 사람을 정식으로 초청하여 그림 실력을 뽐냈다. 그때 비로소 모든 회원들이 완전히 ‘작가’로서 거듭났다
한 폭의 그림 위로 겹겹이 덧칠하는 내일
“캔버스 위에 덧칠하는 것은 희망과 열정 그리고 노력”
좀처럼 코로나19의 사태가 사그라들지 않으면서 여유회 회원들은 혼자만의 작품 활동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심 회장은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에 굴하지 않고 차근차근 헤쳐 나갈 미래를 계획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활동은 잠깐 멈추었지만, 끝난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 동호회에서 수상한 내역을 보면 ‘전국장애인기능경기대회’가 대부분입니다. 어쩌면 다른 대회에 참여하지 않고 지금까지 공공연하게 묵인해 온 우리의 한계였을지 모릅니다. 코로나19가 하루빨리 종식돼서 활발히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 김해미술대회는 물론 전국을 무대로 다양한 공모전에 참가할 계획입니다.” 이들이 움직일 수 있는 신체적 한계는 분명하지만, 이들이 꾸는 꿈과 목표는 마치 날개를 단 듯했다. 송 총무 역시 그가 바라는 동호회의 미래상을 덧붙였다. “혼자 명상하고 싶을 때,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 누군가의 힘이 될 때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마음 편한 동호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 사람과의 대화를 마치면서 김해 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전해주기를 부탁했다.
“김해 시민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성장애인 유화 동호회 ‘여유회’입니다. 그림이 단순히 애초부터 실력 있는 사람들의 취미가 되어야 할까요? 붓을 잡고 싶다면, 흰색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취미 아닐까요? 어떻게 그림을 그려야 할지 몰라서 자문을 구하고 싶고, 함께 소통하며 친목을 도모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 환영합니다. 용기 내서 세상 밖으로 나오시고, 함께할 수 있는 좋은 인연이 되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