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김해로 작업실을 옮겨온 김수 작가는 김해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에게 눈길을 주고 말을 걸어오는’ 오브제들을 수집하고 있다. 그런 오브제를 활용한 작품들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불안을 치유하고 응원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우연히 폐놀이터에서 얻은 영감
전시관에 들어서면 미끄럼틀 하나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올라가는 계단이 없는 이상한 형태다. 미끄럼틀 중간에는 바퀴가 빽빽하게 달린 석고 오브제가 부착되어 있다.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는 불안한 심리가 느껴진다. 옆에 있는 구름다리는 무릎높이까지밖에 오지 않아서 탈 수 없는데다 심지어 철골 구조가 심하게 뒤틀려 있다.
지난 8월 17일, 한새뮤지엄 개인전에서 만난 김수 작가는 이 작품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놀이터는 굉장히 권력적이고 상하관계나 힘의 긴장이 존재하는 공간이라 생각합니다. 유년시절 놀이터에 들어섰을 때 무리지어 있는 또래들을 보며 느꼈던 묘한 불쾌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김해지역에서 얻었다. 오브제 작업을 하기 위해 수집과 채집을 하러 돌아다니다가 주촌마을에서 우연히 버려진 놀이터를 발견한 것이다.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도록 차단된 그 놀이터에서 잊고 있었던 무의식이 떠올랐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작은 사회 안에서 개인의 기억과 감정이 방어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불안과 상처를 치유하는 예술의 힘
2020년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인 ‘아무도 살지 않는다’라는 작품에서는 부산과 경남의 재개발지역을 돌아다니며 못 쓰게 된 문짝 180여 개를 수집하기도 했다. 이처럼 버려진 문짝, 저울, 연탄 등 우리에게 익숙한 물건들을 낯설게 배치함으로써 생경한 장면을 만들고, 거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의 작업방식이다.
“그런 오브제들은 역사성과 시간성을 가진 것들입니다. 이미 용도가 다해 사라져 버려진 것들, 그 외관의 낡은 흔적들이 관람객으로 하여금 개인의 기억이나 향수를 마주하게 합니다. 이처럼 역사나 시간성을 고유하게 가진 것들이 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그는 평범한 일상에서 가져온 오브제들이 각자 개인의 기억들과 부딪히며 여러 관계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이나 상처를 환기하고 치유해주길 기대한다. 작가 자신도 작품을 만들면서 삶에서 겪은 심리적 불안이나 상처를 치유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고. “기본적으로 저는 불안과 긴장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게 제가 작업을 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자 원천인 것 같습니다. 저의 불안을 어떤 때는 직설적으로 나타내고, 또 어떤 때는 모호하게 연출하는데요. 그 행위를 통해 저의 상태나 감정을 직접 바라보며 위안과 위로를 얻는 것 같습니다. 마치 ‘네가 불안과 긴장을 느끼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 해내고 있잖아.’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김해의 시각예술 활성화를 위하여
김수 작가는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3년 전 김해로 작업실을 옮겼다. 남편도 조각·설치 작업을 하다 보니 소음이나 분진에서 자유로운 큰 작업실을 찾아서 김해로 온 것. 양산이나 부산 근교의 지역도 찾아봤는데 접근성과 정서적인 측면에서 김해만한 지역이 없었다고.
“부산처럼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다들 너무 바쁘고 빡빡하기 그지없는데 김해는 상대적으로 사람들도 차분한 것 같고, 작업적 영감을 얻거나 생활하는 데 있어 안정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김해에서 작업실을 마련하고 작업하고 있는 만큼, 지역의 시각예술 발전에 미력하지만 일조하고 싶다고 한다. 다만 김해는 시각예술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타 지역에 비해 조금 부족한 것이 아쉬웠다. 그런데 그의 작업실 옆에 ‘사랑농장’이라는 전시공간도 있고, 최근에는 작가군도 꾸준히 유입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김해에서도 새로운 작품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고 한다.
“더 움직이고 노력한다면 김해에서 시각예술이 활성화되는 날이 금방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해와 관련된 작업을 하기 위해 현재 오브제, 사진, 영상 등을 채집 중입니다. 기록물이 좀 더 쌓이면 김해지역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또 다른 결과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는 본명 ‘김수진’으로 활동하다가 ‘김수’로 활동명을 바꿨다. 김수진이라는 이름이 너무 흔해서 다른 작가들과 헷갈릴까봐 그랬다는 것인데, 알고 보니 ‘김수’라는 이름을 가진 작가도 이미 3명이나 있더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김수진’에서 ‘김수’로. 그 변화가 일상적이고 흔한 것을 비일상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는 그의 작업 과정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향후 작가 김수가 김해에서 어떤 오브제를 만나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빚어낼지 자못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