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음악이다. 집에서 혼자 부르는 노래로는 만족할 수 없는 우리. ‘흥’ 유전자를 타고난 한국인답게 모임의 마지막 코스는 자연스럽게 노래연습장으로 향한다. 신나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가족, 친구, 연인, 직장 동료와 노래로 화합하는 우리의 모습은 한류로 대표되는 문화 강국 한국의 진면모를 보는 듯하다. 외출이 어려운 요즘, 그 속에서 ‘뮤직 이즈 마이 라이프’를 외치며 음악으로 하나 될 그날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가야 시대에는 어떤 음악이 있었을까? 가야인들 또한 음악을 즐겼을까? 흥미로운 가야의 음악에 대해 알아보자.
가야와 음악
6세기 이후 가야 음악은 신라로 망명한 가야인 ‘우륵’을 통해 알 수 있다. 뛰어난 가야금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우륵은 망명 이후 신라인에게 음악을 전수했으며, 그가 작곡한 음악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신라의 기록으로 전해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륵이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가야의 음악은 어땠을까? 문헌 자료 속에는 3세기 가야인의 묘사가 있는데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오월에 씨를 뿌리고 나서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모두 모여서 밤낮없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춘다. 그 춤의 모습은 수십 명이 길게 줄지어서 땅을 디디면서 낮게 걸어가는데, 손뼉을 치면서 절도 있게 박자를 맞추는 것이 방울춤과 비슷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 똑같이 되풀이 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
자료는 가야인이 음악을 어떻게 다뤘는지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음주가무를 동반한 제사는 고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졌다. 주술적인 음악으로 제의(祭儀)에 대한 예를 갖추고 함께 모여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했다. 그러나 당시 모든 음악이 주술을 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조를 보면 ‘풍속에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가야인들은 앞서 주술적인 형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노래와 춤을 즐겼다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음주가무에 능한 우리의 능력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가야금과 우륵
음악의 흥으로 삶을 즐기던 가야인의 민족성은 6세기에 이르러 가야금과 음악인 우륵을 탄생시켰다. 대표적인 전통 현악기 가야금은 악기 이름처럼 자랑스러운 가야의 문화 산물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2 악지(樂志)에는 ‘가야의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었으며 그가 우륵에게 명을 내려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12곡이 만들어졌다’라는 상세한 기록이 있다. 우륵은 가실 왕의 명에 따라 가야 소국의 음악을 모아 가야금 연주곡으로 편곡하여 12곡을 만들고 각국의 방언으로 된 가사를 일원화했다. 대부분 대가야 국왕의 공적을 찬양하는 가사와 주제이지만, 모든 노래가 그렇지는 않다. 세 번째 곡 <보기>는 서역에서 전해진 백제와 신라의 기예 놀이를, 여덟 번째 곡<사자기>는 불교에서 쓰이던 사자춤을 본떠서 만든 곡이다. 이러한 외래적 요소들은 가야의 개방적인 문화 성격과 우륵의 외래문화 수용 정도를 보여준다.
대가야에서 악사로 활동하면서 왕실로부터 대접을 받던 우륵은 돌연 악기를 들고 신라로 망명해 버렸다. 나라가 어지럽다는 것이 이유였다. 6세기 중반 가야는 계속해서 백제와 신라의 압박을 강하게 받았다. 가야 제국의 자구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고 가야의 여러 소국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암울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거기에 대가야 내부의 기강마저 문란해지고 외래적 위협에도 둔감해져 있었다. 대가야의 기강을 본 우륵은 더는 자신의 나라에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나갔다.
우륵이 가야를 떠난 그 후
신라에 온 우륵은 진흥왕의 배려로 여전히 악사로서 활동했다. 악곡을 만들어 왕 앞에서 연주하고 왕으로부터 명을 받은 제자들에게 음악을 전수하기도 했다. 우륵이 악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얻게 된 이유는 그의 음악이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국가 의례 때 사용하는 대악(大樂)은 우륵이 가야에서 가져온 12곡에서 그의 제자들이 신라의 정서에 맞게 5곡으로 편곡해 사용됐다. 최고의 음악가로 명성을 떨친 우륵이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오늘날 충주인 국원에서만 거주해야 했다. 사실상 행동반경에 제약이 있었던 것이다. 신라의 왕으로부터 재능과 신분은 보장 받았지만, 죽을 때까지 그는 이방인이었으며 완전한 신라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없었다. 음악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열쇠가 됐지만, 이방인이라는 영원한 족쇄를 채우게 했다. 우륵이 신라에 전한 가야의 음악과 악기는 혼란스러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선율을 타고 살아남았다. 그가 전해준 가야의 선율은 지금의 한류처럼 신라에 전해진 새로운 바람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