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8일은 상공의 날이다. 달력 속에 자그마하게 적힌 글자가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상공의 날은 나라의 상공업 진흥을 위해 제정한 법정 기념일이다. 상품 판매를 목적으로 삼는 상업과 생활에 필요한 여러 물건의 가공·생산을 목적으로 삼는 공업은 현대사회에서 나라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기에 국가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육성하고 있다. 고대 국가 가야는 어땠을까? 남겨진 기록은 없지만 출토된 유물을 보면 그 답을 유추할 수 있다. 가야의 상공업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철을 다루는 기술, 공업
가야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철의 나라’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그만큼 철은 가야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청동과 달리 구하기 쉽고 단단한 철을 무기로 만들면 청동기보다 높은 내구성을 자랑한다. 군사력이 국력이던 시대에 철을 다루는 정교한 기술은 어떤 국가도 따라잡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이었다. 가야는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때 신라를 압박하는 수준으로 큰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뛰어났던 제철 기술을 증명이라도 하듯, 출토되는 가야 시대 유물 중에서 토기와 함께 철기가 가장 많다. 대표적으로 갑옷, 투구, 무기, 마구, 농기구와 제례 용품 등으로 철기 제품은 수량도 많고 종류도 다양해 가야의 철제 유물은 고대의 무기 체계 등을 파악할 때 빼놓을 수 없다. 가야인들은 철을 어떻게 다뤘을까? 철기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특수한 기술이 필요하다. 기원전 4~3세기 한반도에 철기가 유입되면서 기원전 1세기부터는 본격적인 철기시대의 막이 올랐다. 가야는 양산 등 철산지가 풍부했기 때문에 철광석을 이용한 철 생산이 굉장히 왕성했다. 한국문물연구원이 창원 의창구 봉림동 유적에서 4~5세기경의 제철 유적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가야시대 유적으로 보고 있다. 망치, 집게, 모루 등의 작업 공구와 철의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파편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방지, 연료를 보관하는 저장창고 등 철의 생산이 부흥했음을 말해주는 유적과 유물이 출토돼 비밀에 싸여 있던 가야 철기 문화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 있다.
철기로 시작된 교역, 상업
철 생산이 활발히 이뤄지면서 가야는 덩이쇠인 철정(鐵鋌)을 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철정이란 일정 규격으로 제작된 쇳덩이로 철기 제품의 소재로도 사용됐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 지역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馬韓), 예(東濊), 왜(倭)인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중국의 군현(郡縣)인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가야는 북방의 중국부터 동쪽의 일본에 이르기까지 철 생산이 번성한 만큼 교역의 물결이 크게 일렁였다. 활발한 해상 활동으로 왜(倭)와는 쓰시마섬을 거쳐 규슈 및 긴키 지방을 연결하는 항로가 있었으며,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마한(백제)과는 남해와 서해, 동예(東濊)와는 동해를 이용했다. 이렇듯 가야는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와 교역을 통해 눈부신 성장을 이룩해 갔다. 삼국시대를 스쳐 간 작은 나라로 알고 있는 가야. 그들은 한반도에서 철기 문화를 화려하게 이끌어간 작은 거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