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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김해청년시각예술인지원사업 작가 평론] (2) 우시온 작가
지속 가능한 동시대 미술가
글.김병수(미술평론가)
우시온의 작업 중 내 눈에 강력하게 들어온 것은 한 여인의 삼면화였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거나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을 주제로 철학자 질 들뢰즈가 쓴 <감각의 논리>를 읽어보자.

“그림이란 고립된 한 현실 혹은 사실이다. 삼면화도 하나의 동일한 틀 안에, 함께 결합해서는 안될 세 개의 고립된 판을 가지고 있다. (중략) 회화가 구상적인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하나는 추상을 통해 순수한 형태를 지향하는 것, 다른 하나는 추출 혹은 고립을 통해 순수하게 형상적인 것으로 향하는 것이다.”

우시온의 작품을 여기에 그대로 꿰맞출 수는 없지만 시사하는 바가 아주 커 보인다. 구상적 재현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각의 형상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처음에 평론 의뢰를 받았을 때 당황스러웠다. 아직 대학에 재학 중인 작가였다. 그러나 직접 보니 훨씬 인상적이었다. 작품은 입시 미술을 익히지 않은 바탕에서 나오고 있었다. 대화 중에 13살 때 첫 개인전을 가졌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당시 갤러리 대표는 “부산화단의 작가로부터 재능이 탁월한 시온 군의 드로잉을 받아보고 흔쾌히 전시를 했다”고 밝혔다.

우시온의 출발을 알았다면 다시<감각의 논리>를 이어서 읽어보자. 베이컨과 직접적인 비교는 아니지만 아주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삼면화의 분리된 판들은 강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서술적인 것은 아니다. (중략) 그러면 서로 짝 지워진 혹은 구별된 형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 다른 유형의 관계들이란 무엇인가? 대상들의 혹은 관념들의 지적인 관계에 반대하는 이 새로운 관계를 우리는 사실 관계(matters of fact)라고 부른다.” 그래서 전통회화를 전공 중인 그에게 더 기대가 된다. 비교미학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역사미학까지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시온은 2017년 <향기: 시간 여행자의 선물>전시에서 “그림에 향기를 담고 싶었다. 눈으로 바라 보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 다운 그런 이야기를 향기로 남기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 무렵에는 기존 펜화에 색이 더해지면서 집중적인 분위기를 띤다. 이어지는 <신화, 난 아직도> 전시 작업에서는 일본 여행에서 구입한 전통 회화 물감과 한국 것들이 혼합되어 사용되었다. 형상과 질료 모두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다시 우시온의 삼면화로 돌아가서 <감각의 논리>를 읽어보자. “형상은 그림의 일부만 차지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나머지를 채우게 될 것은 형상과 관계되는 풍경도 아니고, 형태가 솟아날 배경도 아니며, 그림자들이 노닐 비정형이나 명암 혹은 두터운 색채도 아니다. 또는 다양한 변화가 전개될 직물 짜기도 아니다. (중략) 하지만 숙명이라는 것은 전혀 반대처럼 보이는 우회로를 거쳐 오는 경우도 있다.”

즉, 삼면화의 세 점은 하나이면서 셋인 것이다. 그래서 작품 <관계의 정원>은 중요하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의 예술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것이 경제적·사회적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내일보다 나은 세상을 그려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관계의 정원을 아름답고 소중히 가꾸려고 한다.”

우시온의 ‘관계 예술론’은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의 미학>과는 어떤 관계를 맺을까. “예술적인 행동은 소박한 접촉들을 실행하고, 막힌 통로들을 열며, 서로 동떨어져 있는 현실의 여러 층위들이 접점을 찾도록 노력한다.” 여기까지는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니콜라 부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관계가 직접적으로 경험되지 않을 뿐 아니라 ‘스펙터클한’ 재현 안에서 소원해지는 사회, 여기에 오늘날 예술의 가장 예민하고 뜨거운 문제가 놓여 있다. 전통적으로 ‘재현’에 귀속된 실천의 장―미술사―안에서 아직도 세계에 대한 관계를 생산하는 것이 가능할까? (중략) 오늘날의 예술적 실천은 사회적 실험의 풍요로운 현장이자 행동의 획일화로부터 부분적으로 보호된 공간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작품들은 근거리의 유토피아를 보여 준다.” 즉, 니콜라 부리오와 우시온은 관계하는 방식, 상정하는 예술의 의미 자체가 다르다.

이번 전시에 대해 우시온은 이렇게 기록했다. “슬픔을 겪은 사람은 훌쩍 성장하기 마련이다. 때론 마음속에 존재하는 우울한 감정을 숨기려 하지만, 행복이란 어쩌면 외면해온 우울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깨닫는 순간에 얻어지는 것일지모른다. 그래서 멜랑콜리아는 행복의 다른 이름이고 슬픔은 행복을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과정임을 알았다. (중략) 행복이란 지금 이 순간에도 주위에 있다는 것. 슬픔과 고독, 상실 이 모든 것이 행복에 속한다는 것을. 오늘도 완전함을 꿈꾸는 내면 속 불안한 존재의 자아가 산책하듯 멜랑콜리 정원을 거닐고 있다.”

서양 문화의 근원적 파토스인 멜랑콜리아를 우시온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작업한다. 철학자 김동규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과 죽음이 동서고금 통용되는 인간의 조건이듯, 멜랑콜리는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함축하는 말로 이해된다. 사랑하는 대상과 언젠가는 이별해야만 한다면, 멜랑콜리는 인간의 운명이다. 사랑하다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견디며 살아가다가, 스스로도 죽어갈 수 밖에 없는 존재, 그가 바로 ‘호모 멜랑콜리쿠스(homo melancholicus)’다. 결국 사랑과 죽음이라는 근원적 경험 속에서 멜랑콜리가 발원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도 멜랑콜리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전문 연구자와 예술가 사이를 동시에 보여주는 우시온은 지속 가능한 동시대 미술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성일. 2024. 01.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