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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치, 다시 날아오르다
이날치라는 세계

이날치, 이야기의 시작

국악. 지금은 대중과 조금 멀어진 곳에,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해야 할 소중한 우리 것으로 분류된 음악이다. 처음부터 이런 취급을 받았던 건 아니다. 양악을 기반으로 한 대중음악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 국악이 한국의 ‘대중음악’이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국악이 대중 사이에 거리가 생기기 시작한 계기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누군가는 80년대까지만 해도 심심치 않게 TV에 등장하던 판소리 명창들을 언급하며 시대에 따라 대중의 기호가 바뀐 탓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국악은 어렵다는 대중의 뿌리 깊은 인식을, 누군가는 대물림되는 국악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을 지적한다. 모두 경험을 근거로 한 분석이며 이는 슬프게도, 국악은 어쨌든 지금의 대중과 멀어진 차가운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바로 그때, 이날치가 나타났다. 판소리를 뼈대로 한 ‘얼터너티브 팝(Alternative Pop)’을 지향하며 슈퍼 히어로처럼 불쑥 나타난 이들은, 다행히 혼자가 아니었다. 2015년을 전후해 국악을 아끼고 또 직접 행하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신들이 사랑하는 음악을 전에 없던 방식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동문으로 구성된 ‘잠비나이’는 피리와 해금, 거문고로 포스트 록을 구사하는 압도적인 개성을 가진 밴드였다. 그런 이들에 영국 레이블 벨라 유니온, 세계 최대 규모의 음악 페스티벌 글래스턴베리 등 해외가 먼저 반응했다. 정가악회 소속 연주자들이 모여 결성한 9인조 밴드 ‘악단광칠’은 대금, 아쟁, 생황 등 다채로운 악기 구성과 소리꾼의 조화로 황해도 굿과 서도소리를 중심으로 한 매력 넘치는 음악을 뽐냈다.
그 가운데 ‘어어부 프로젝트’ 활동과 각종 영화음악 작업으로 명성 높은 장영규와 무형문화재 57호 경기민요 이수자로 ‘민요계의 아이돌’로 불리던 이희문이 손을 잡은 씽씽도 있었다. 이들은 밴드를 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2017년 미국 공영방송 NPR의 대표 콘텐츠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Tiny Desk Concert)’에 출연하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아델, 존 레전드 같은 세계 팝 시장을 대표하는 이들이 출연한 것으로 유명한 채널에서, 씽씽은 전통 민요에 록, 힙합, 디스코, 레게 등 다양한 음악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혼재한 특유의 음악 스타일로 새로운 음악을 찾아 헤매는 전 세계 음악 마니아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드래그 퀸을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파격적인 의상에 ‘베틀가’ ‘난봉가’, ‘타령’ 등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루브와 리듬이 그야말로 쏟아져 내렸다. 이들이 벌인 한 판 난장(亂場)은, 현재 700만 뷰를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이날치의 탄생은 이러한 흐름 위에 거침없는 그들만의 역사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뜨거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오래 이어가지는 못한 씽씽은, 베이스 장영규를 중심으로 한 이날치와 소리꾼 추다혜가 결성한 추다혜차지스 두 갈래로 나뉘어 해당 신에 새로운 물줄기를 텄다. 굿과 훵크(Funk) 음악 사이 교감하는 초월적인 맥을 짚어낸 것이 추다혜차지스였다면, 이날치는 씽씽으로 한 번 맛보았던,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대중에게 폭넓게 사랑받을 수 있는 ‘대중음악’으로서의 국악이 가진 가능성을 다시 한번 시험해 보는 자리였다. 물론 그 시험은, 대성공이었다.

이날치라는 세계

이날치 음악의 중심에 놓인 건 판소리와 리듬이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명창 가운데 한 명인 이날치의 이름을 그대로 밴드 이름으로 사용한 이들은, 판소리가 가진 전통의 가치는 그대로 지켜나가면서도 그 안에 숨어 있는 팝적인 1인치의 흥을 찾아 헤매는 데 집중했다. 쉽게 말해, 국악을 좀 더 대중음악의 한가운데로 던져 넣었다. 악보나 레코딩 기술이 없던 시대, 대중과 호흡하며 스스로 모습을 바꿔온 판소리를 대중음악이라는 필터를 거쳐 21세기적 형태로 보여주겠다는 야심도 곳곳에 엿보였다. 이날치의 멤버들이 판소리 ‘수궁가’를 모티브로 한 음악극 〈드라곤 킹〉을 위해 처음 만난 사이였다는 점도 국악과 대중음악의 교차점에 선 이들의 어떤 ‘정신’을 확고히 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밴드의 목소리를 담당하는 소리꾼 권송희, 신유진, 안이호, 이나래 네 사람을 모았으니 이번에는 리듬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했다. 씽씽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드러머 이철희와 장기하와 얼굴들의 베이스로 활약했던 정중엽이 합류했다. 더블 베이스에 드럼 하나, 소리꾼 넷이라는 지금까지 유례를 찾을 수 없었던 신묘한 조합의 대안적 팝 밴드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후는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바로 그 성공 가도였다. 밴드를 결성한 2019년 초부터 ‘채널1969’, ‘스트레인지 프룻’, ‘생기 스튜디오’ 등 홍대에 위치한 소규모 클럽을 중심으로 공연하며 ‘공연이 끝내준다’는 입소문을 탄 이들은, 그해 5월 현대카드 언더 스테이지에서 열린 ‘들썩들썩 수궁가’ 공연으로 본격적인 인기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해 9월 촬영한 네이버 온스테이지 ‘범 내려온다’ 영상은 업로드와 동시에 200만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고, 뒤이어 이들을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한 한국관광공사의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Feel the Rhythm of Korea)’ 영상이 터졌다. 하루에 한 번 홀린 것처럼 ‘범 내려온다’를 보게 된다는 ‘1일 1범’ 같은 별명을 낳으며 승승장구한 이들은, 밴드뿐만이 아닌 노래가 가진 흥과 중독성을 온몸으로 표현한 댄스팀 앰비규어스 컴퍼니와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아트 디렉팅으로 이날치의 음악을 한껏 돋보이게 만들어 준 오래오 스튜디오 등 이들과 협업한 아티스트의 가치까지 함께 높였다. 2020년 5월 발표한 정규 앨범 ‘수궁가’에 이어 2021년 싱글 ‘여보나리’까지 독보적인 행보를 걸어 나가고 있는 이들의 진가는 누가 뭐래도 공연이다. 길었던 2년의 기다림 끝에 비로소 조금씩 기지개를 켠 공연장으로 조선 힙스터가 성큼성큼 걸어온다. 그때처럼 모든 것을 뒤집어 놓을 기세로.

작성일. 2021.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