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김해문화재단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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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海亭中夢幾回(산해정중몽기회)
산해정 안에서 꿈을 몇 번이나 꾸었나
글.화유미 사진.백동민
한적하고 평범한 원동마을은 신산서원과 남명 조식 선생의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수려하게 달라진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남명 조식 선생이 30세부터 45세까지 살며
학문과 사상을 정립하고 제자를 길렀던 곳이 신산서원 내에 있는 산해정이다.
그리고 신산서원 부근에 형성된 마을을 뜻하는 원동마을은 이름처럼
남명 조식 선생의 이야기가 스며있는 곳이다.

원동마을 이야기

경남의 학자를 이야기할 때 꼭 언급되는 인물이 있다. 남명학파를 이룬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실천을 강조한 사상가 남명 조식 선생이다.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였으며, 오직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해 존경받는 인물이다. 선생의 흔적은 경남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보통 선생이 태어난 합천이나 마지막 여생을 보낸 산청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선생의 중요한 유적이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원동마을에 있다. 바로 그가 30세부터 45세까지 처가살이를 하며 학문을 정립하고 제자를 가르치던 산해정, 신산서원이다. 남명 조식 선생의 흔적이 있다는 원동마을에 들어서자 마을 풍경 하나하나가 글귀처럼 눈에 들어온다. 산해교를 지나 원동마을 어귀에 들어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신산서원이 보인다. 마을을 거닐다 보면 가까이 산 능선도 병풍처럼 펼쳐진 걸 볼 수 있는데, 돗대산과 까치산이다. 평범한 시골마을 같지만 마을부터 산의 지명까지 남명 조식 선생의 신산서원에서 비롯됐다. 원동마을은 <김해지리서>에 의하면 ‘서원곡(書院谷)이며 조식을 모시는 신산서원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는 신산서원 부근에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다. 원동마을 옆에 있는 돗대산의 과거 지명도 남명 조식 선생과 연관돼 있다. 돗대산은 과거 차산(次山) 혹은

조차산(曺次山)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차산은 선생의 아들 이름이다. 선생이 44살 되던 해에 아들 차산이 죽어 돗대산에 묻었는데 이후 산 이름을 차산, 조차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산서원과 산해정

청렴한 선비를 닮은 신산서원을 보자 내부가 궁금해진다. 평소 서원은 굳게 닫혀 있는데 문화재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관리 차원에서 문을 닫아두고 있다. 관람을 위해 안내문에 쓰인 연락처로 전화를 하면 금방 내부를 볼 수 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조금 더 세심하게 바깥을 관찰해 본다. 덕분에 평소라면 보지 못했을 입구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의 시비도 읽어본다. 푸른 대나무의 절개를 노래 한 시에서 선생의 꿋꿋한 선비정신을 느낄 수 있다. 당시 김해는 왜구의 침탈이 빈번하여 양반들이 거주하지 않았는데 남명 조식 선생이 산해정을 세워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키우면서 유학 풍속이 정착했다. 산해정(山海亭)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굽어본다는 뜻으로, 학문을 닦아 경지가 높아지면 경륜과 도량이 바다처럼 넓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1593년(선조 21)에 서원으로 착공했으나 왜란으로 중지된 것을 1609년(광해군 1)에 완성하여 신산서원이라고 하였다.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25호 신산서원은 앞면 5칸, 옆면 2칸에 추녀 끝을 올린 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소박한 겉모습처럼 내부도 정갈하다. 서원 여기저기에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덕분에 여름이면 조금 화사해진다. 선생은 이곳의 어떤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을까? 산해정에서 15년 정도를 은거하면서 선생은 김해의 아름다운 경치와 이곳 생활 등을 시로 옮겼다. 남명 조식 선생이 바라보았을 김해를 상상하며 산해정에서 바라보이는 김해를 오랫동안 눈에 담아본다.

산해정우음(山海亭偶吟)

十里降王界 십리강왕계
10리 저곳 왕이 내려오신 곳

長江流恨深 장강류한심
긴 강에 흐르는 한 깊기도 해라

雲浮黃馬島 운부황마도
구름은 누런 대마도에 떠있고

山導翠雞林 산도취계림
산은 비췻빛 계림으로 통한다

신산서원

  • 김해시 대동면 대동로269번안길 115
  • 055-331-6232
작성일. 2023. 0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