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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이야기

김해문화재단, 문화의 문턱을 낮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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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인의 의생활로 알아보는 패션 탐구
가야인의 의복 문화, 그것이 알고 싶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봄볕이 나른한 오후를 만들어 내는 4월. 하늘거리며 흩날리는 핑크빛 벚꽃과 불어오는 바람에 담긴 봄 내음은 괜스레 마음을 들뜨게 한다. 따뜻해진 날씨는 사람들의 옷차림에도 봄을 피웠다. 두꺼운 코트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봄옷을 맞이하는 옷장 정리가 시작되면, 방안은 작은 패션쇼가 열린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에서 가야인 또한 계절의 변화에 따라 옷장 정리를 했을 것이다. 다음 날 입을 옷을 고르며 설레였을 가야인의 패션을 탐구해 보자.

옷의 시작은 옷감으로부터

우리가 즐겨 입는 옷의 안쪽 면을 살펴보면 조그마한 품질 표시 라벨이 부착돼 있다. 라벨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옷을 재작할 때 사용한 옷감이 설명돼 있는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면·양모 같은 천연 섬유부터 나일론·폴리에스터 같은 화학 섬유까지 다양한 직물을 사용하고 있다. 가야인들의 옷에는 어떤 라벨이 부착돼 있었을까? 가야시대의 직물은 동물성 섬유와 식물성 섬유로 나뉜다. 동물성 섬유에는 견(絹)류가 있었는데, 3세기 가야 사회를 보여주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변진조의 기록에는 변진(가야)인들이 ‘뽕나무를 재배하고 누에치기를 할 줄 알고 겸(縑)과 포(布)를 만들 줄 안다’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겸(縑)은 각종 비단을 총칭하는 보통 명사이고 포(布)는 동물성 면포(緜布)를 말한다. 면포는 나방이 나와 버렸거나 병들어 품질이 낮은 고치를 부풀려 목화솜처럼 만든 다음, 이 솜으로부터 실을 자아내서 짠 옷감을 가리킨다. 가야에는 겸이나 면포 외에 다른 비단 종류도 있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에 능(綾)이라는 이름의 비단이 등장하는데 능은 얼음결과 같은 무늬가 있는 얇은 천으로 교역을 통해 들어온 수입품이었으며 주로 신분이 높은 계층에 많이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식물성 의복 재료로는 비단에 버금가는 고급 직물로 꼽히는 세포(細布)가 있었는데, 폭이 넓어 광폭 세포(廣幅細布)라 불렸다. 세포는 마의 일종인 경마(檾麻)로 짠 섬세한 직물로서 식물성 섬유 가운데서는 가장 고급 직물이었다. 단순한 세포가 아닌 폭이 넓은 것이라고 기록한 것은 광폭 세포가 일반 세포보다 직조하기 어려웠고, 이 지역의 특산물로 이름났기 때문이었다. 세포와 대응하는 옷감으로 보통 품질의 포(布)가 있다. 대마나 칡의 섬유질로 만든 거친 식물성 베로서 일반 백성들이 사용한 옷감 재료였다. 베옷은 기온이 높을 때는 실용적인 옷감이나 추위를 막기에는 부적합했다. 따라서 추위를 막기 위해 짐승의 털이나 조류의 깃털을 옷 속에 대어 누비거나 털가죽 자체를 의복과 함께 걸쳐 입기도 했을 것이다.

가야의 패션 디자인

같은 옷감을 사용해도 어떻게 디자인을 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가야인의 패션은 기록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3세기 기록인 <삼국지(三國志)>에는 의복과 거처가 변한(가야)과 진한(신라)이 같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6세기 신라 법흥왕대에 신라는 공복 제정을 통해 관에 속한 사람들의 옷을 정비했기 때문에 6세기 이후부터 공복에는 차이가 생겼으나 일반 서민의 경우 신라와 가야의 의복에는 특별한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3세기의 <삼국지(三國志)>기록과 제작 연대가 4~5세기로 추측되는 신라토우는 가야인의 옷 모양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삼국지(三國志)>에는 3세기 가야 남성이 ‘책(幘)’이라는 모자를 착용하고 자유롭게 중국 군현에 가서 ‘인수(印綬)’를 얻어왔는데, 인수를 받은 삼한의 백성이 천여 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토우의 남성 의상을 자세히 보면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으로 하며 여기에 고깔처럼 생긴 모자를 더해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다. 이 무렵 가야의 지배층 남성은 바지와 저고리, 그리고 겉옷을 입고 책을 쓰고 인수를 차고 있는 모습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수서(隋書)>에는 신라의 의복은 고구려, 백제와 대략 비슷하다고 나와 있다. 가야인의 옷 모양 역시 기본적인 형태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고구려인들의 옷 모양에서 추정할 수 있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일반 병사의 옷차림은 저고리와 통이 좁은 바지차림이며, 주로 무채색이나 단색을 띠고 있는데 재료는 면포나 마직으로 추정된다. 여성의 경우에는 주름이 표현된 치마와 비교적 긴 기장의 저고리를 입었고, 저고리 위에는 허리띠를 둘렀으며, 두루마기 같은 겉옷을 착용하였다. 이런 모습은 고구려 고분 벽화의 여성 의상이나 신라토우에 표현된 의상에서 알 수 있다. 고분 벽화에서는 여성도 바지를 착용하고 있는데, 무용을 하거나 주인의 시중드는 일 등을 하기 위한 복장이었으며, 속바지로 입기도 했다.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는 의복 문화를 발전시켰다. 봄옷과 여름옷이 다르듯 옛부터 우리에게는 다양한 옷이 필요했을 것이다. 누에와 대마를 기르며 부지런히 다음 계절을 준비해야 했을 가야인을 떠올리면 그 수고로움에 경외감이 든다. 하지만, 천을 직조하면서 새 옷을 기다렸을 그들의 설렘은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글·사진 홍슬기 에디터

작성일. 2020. 0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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